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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프란티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Austro- slawismus)

김장수 관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2012/11/14

오스트리아 왕국은 16세기 초반 보헤미아-헝가리 왕국을 편입함에 따라 다민족국가체제로 변형되었다. 이후부터 이 왕국에서 제기되었던 민족문제, 특히 비독일계 민족에 대한 법적·사회적 불평등문제는 3월혁명(1848)이 발생할 때까지 사회적 관심대상에서 배제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3월혁명이 발생한 이후 바뀌게 되었다. 이제 비독일계 민족의 정치가들은 민족문제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게 되었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등의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각 민족의 정치가들은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했다. 코슈트(L.Kossuth)를 비롯한 헝가리 정치가들은 헝가리를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이탈시키려고 했지만 제국 내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슬라브 민족의 정치가들은 그러한 방법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을 인정하고 거기서 그동안 인정되지 않았던 민족적 자치권을 부여받으려고 했다. 이러한 방향을 주도한 인물은 오늘날 체코 민족의 국부(otec naroda)로 추앙되고 있는 팔라츠키(F.Palacký:1798-1876)였다. 팔라츠키와 그의 지지세력, 즉 샤파르지크(P.J. Šafarík)와 하블리체크-보로프스키(K.Havliček-Borovský) 등은 기존의 질서체제를 인정하고 거기서 민족적 자치권도 획득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Austroslawismus)의 핵심적 내용이라 하겠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최초로 제시한 인물은 팔라츠키가 아닌 도브로프스키(J. Dobrovský)였다. 그는 1791년 9월 25일 오스트리아 국왕, 레오폴드 2세(Leopold II)의 보헤미아 왕위계승을 축하하면서 오스트리아 왕국에 대한 왕국 내 슬라브 민족의 충성 및 헌신을 강조했다(O stálé věrnosti, kterouž se národ slovanský domu rakouského po všechen čas přidržel). 아울러 그는 체코어가 보헤미아 지방에서 다시 사회공용어, 즉 학교 및 법정에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견해도 밝혔는데 그 이유는 그가 문화적 측면에서의 자치권획득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도브로프스키의 이러한 관점에 대해 보헤미아 지방의 귀족들 역시 지지의사를 밝혔는데 그러한 것은 이들 역시 문화적 측면에서의 자치권허용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보헤미아 귀족들은 빈 정부의 중앙정책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이 정책으로 인해 자신들의 제 권한이 박탈내지는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점차적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제 권한을 지키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들은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제 권한을 지키는데 필요한 당위성을 찾아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그러한 과제를 보헤미아의 지식인들, 특히 체코의 지식인들에게 위임시켰다. 이러한 과제를 부여받은 체코의 지식인들은 역사뿐만 아니라 언어의 정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명했는데 그러한 것들은 문화적 측면에서 지향되었던 자치권 획득의 핵심적 사안들이라 하겠다. 

그러나 도브로프스키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는 1840년대에 접어들면서 지지 기반을 점차적으로 잃게 되었는데 그것은 정치적 요소를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에 가미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 된 것과 그러한 견해에 동조하는 세력이 증대 된데서 비롯된 것 같다. 이 당시 체코 민족운동을 주도했던 팔라츠키, 샤파르지크, 그리고 하블리체크-보로프스키 등은 도브로프스키와는 달리 슬라브 민족의 법적․사회적 평등이 왜 필요한가를 부각시키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팔라츠키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을 인정하는 대신 슬라브 민족의 법적․사회적 평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정치체제, 즉 연방체제(federace- systém)의 도입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 당시 중부 유럽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팔라츠키는 제국 내 슬라브 민족들의 독립시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은 슬라브 민족들의 독립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제국 내 슬라브 민족들이 독립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갖출 경우 독립도 모색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데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체코 및 독일의 역사가들은 도브로프스키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와 팔라츠키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 사이에서 확인되는 차이점을 심도 있게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따른 내용 구분도 시도했다. 노바크(M.Novák)는 도브로프스키의 친오스트리아적 성향을 ‘봉건적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 또는 ‘보수적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 팔라츠키의 친오스트리아적 성향을 ‘진보적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 또는 ‘정치적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로 분류했다. 샴베르게르(Z.Šamberger), 모리트쉬(A. Moritsch), 빈터(E. Winter), 볼만(F. Wollman), 그리고 바브라(J. Vávra) 등도 이러한 연구 및 분류작업에 참여했다. 이들은 도브로프스키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본래적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 팔라츠키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전략적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로 정의했다. 특히 모리트쉬는 팔라츠키가 연방체제의 도입을 지향했기 때문에 그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친오스트리아연방주의로 간주해도 된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3월혁명 이후 독일권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움직임이 가시화됨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내의 슬라브 지식인들도 슬라브 세계의 결집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팔라츠키는 1848년 4월 11일 프랑크푸르트 예비의회(Frankfurter Vorparlament)로부터의 제의, 즉 체코 민족의 대표로 독일통합간담회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면서 자신이 지향하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팔라츠키는 자신의 거절편지(Absagebrief nach Frankfurt)에서 체코 민족이 신생독일에 참여할 경우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그들이 그동안 누렸던 법적·사회적 지위마저 잃게 되리라는 것을 언급했다. 이러한 그의 판단은 보헤미아 지방에서 체코 민족이 독일 민족보다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것과 제국 내 다른 슬라브 민족과의 유대관계가 신생독일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거절편지에서 빈 정부의 중앙체제에 대해 불만을 가진 제국의 슬라브 민족들이 독일 민족처럼 독립을 지향할 경우, 그것은 불가능하고, 무모한 행위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이 당시 팔라츠키는 러시아가 유럽의 북부 지역에서 시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남부 지역에서도 세력 확장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가 이러한 시도를 통해 보편왕조(univerzální monarchie)를 건설하려고 한다는 것과 그러한 왕조가 향후 많은 재앙을 유발시키리라는 것도 예측했다. 여기서 팔라츠키는 이러한 표명으로 자신이 러시아에서 반 러시아적 인물로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러한 것에 대해서 별로 개의치 않았다.

팔라츠키는 러시아의 이러한 야욕에도 불구하고 슬라브 민족들이 민족주의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을 이탈하여 독립 국가를 형성할 경우 과연 그러한 국가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 지에 대해 강한 의구심도 제기했는데 그것은 그가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그것에 따른 슬라브 세계의 통합시도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즉 팔라츠키는 니콜라이 1세를 비롯한 러시아의 핵심세력들이 즉시 이들 국가들을 러시아에 병합시키려 할 것이고, 병합된 이후 이들은 더욱 열악한 상황 하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인지했던 것이다. 이 당시 팔라츠키는 러시아의 경직된 지배구조와 거기서 파생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는 슬라브 세계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러시아의 경제적 낙후성으로 인해 비러시아계통의 슬라브인들의 생활수준은 이전보다 훨씬 낮아지리라는 사실도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팔라츠키는 자신의 편지에서 제국 내 슬라브 민족들이 주어진 체제를 인정하고 거기서 그들의 민족성을 보존하면서 권익 향상을 점차적으로 도모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아울러 그는 슬라브 민족들이 기존의 통치방식 대신에 제국 내 제 민족의 법적․사회적 평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연방체제의 도입을 빈 정부에 강력히 촉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그런데 팔라츠키가 구상한 연방체제의 근간은 미합중국 및 벨기에에서 시행되었던 제도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양국의 연방체제에 대한 자신의 긍정적인 입장에서 비롯된 것 같다. 여기서 팔라츠키는 중앙정부의 권한과 지방정부의 권한을 구분시켰는데 그에 따를 경우 중앙정부는 제국존속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제 권한, 즉 외교권, 국방권, 그리고 교통권만을 가지고 여타의 권한들은 지방정부에 위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 체제와의 협상을 요구한 팔라츠키의 이러한 자세는 빈 정부가 제국 내에서 슬라브 민족들이 차지하는 비율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과 그 동안 등한시했던 이들의 법적·사회적 지위향상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가를 인식해야 한다는 묵시적인 강요도 내포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팔라츠키는 자신의 거절편지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배제시킨 소독일주의(Kleindeutschtum; malé němectvi) 원칙에 따라 독일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그렇게 형성된 ‘신독일(Neues Deutschland)’과 공수동맹 체제를 구축하여 러시아의 팽창정책에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아울러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이 동맹 체제를 기초로 한 유럽의 질서체제유지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팔라츠키는 이러한 공수동맹체제의 결성이 불가능할 경우 양국의 경제적 관심을 보장하고, 증대시키는 관세동맹체제의 구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관점도 피력했는데 그러한 것은 오스트리아 제국이 단독으로 러시아의 의도를 저지시킬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 같다.

팔라츠키는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에 이중체제(vyrovnání)가 도입될 때 까지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지향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변형됨에 따라 자신이 그동안 지향한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포기하고 러시아와의 연계가능성을 모색했으나 실망만 하게 되었다. 그것은 러시아 지식인들이 러시아의 주도로 슬라브 세계를 통합시켜야 한다는 이론만을 고집한데서 비롯된 것 같다. 이후부터 팔라츠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체제를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의 삼중체제로 변형시켜 당시 제국 내에서 제기되던 민족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그러한 관점에 대해 대다수의 체코 정치가들 역시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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