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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간 의사소통의 시작:고개를 끄덕이며 부정을 표현하는 불가리아 사람들
불가리아 / 튀르키예 김원회 한국외국어대학교 그리스불가리아어과 교수 2013/03/27
불가리아를 여행하거나 방문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장 신기해하는 부분이 바로 그들의 대답법이다. 필자가 불가리아에 처음으로 유학하였을 때의 일화는 지금도 지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평소 고기를 좋아하던 필자는 불가리아에 도착 후 바로 정육점을 찾았다. 그리고 소고기가 있냐고 필자는 어렵게 운을 띠었다. “Имате ли телешко месо?” 그러자 정육점 주인은 연신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없다는 표시를 하는 것이다. 다음 날 가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러기를 수차례, 너무나 이상한 생각이 들어 불가리아 동료 학생에게 불어보니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불가리아 사람들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예”를 표시하고, 고개를 위아래로 저으며 “아니오”를 대답한다는 설명이었다. 언젠가 세상에는 “예”와 “아니오”의 대답을 거꾸로 하는 민족이 존재한다는 설명을 읽은 기억이 머리를 스쳤고 그것이 다름 아닌 불가리아 민족이라는 사실에 놀라움과 신기함이 겹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부정을 표시하는 세계 유일의 불가리아식 응답법은 왜 어디서 나타난 것인가 ?
이 문화 현상의 기원은 바로 오스만 터키의 압제시기로 찾아가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 피지배 민족에게 실행한 동화 정책은 종교를 중심으로 매우 엄하였다. 오스만 터키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제국 내에서 생활하고 있는 여러 민족의 복종과 단합을 꾀 할 목적으로 자신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강요하였다.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종교 뿐 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의 전이로 포함하는 것이었으므로 자신들의 지배 목적에도 매우 부합되는 것이었다. 오스만 터키의 가장 인접국이었으며 유럽으로 나가는 통로 역할을 하던 불가리아에서 불가리아 민족의 개종은 매우 중요한 사안 중에 하나였다.
오스만 터키의 종교 개종 정책은 결국 그들의 지배 기간 동안 제법 많은 수의 불가리아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렇게 계속되는 개종의 강요는 불가리아인들에게 민족적 자존과 자긍심을 일깨우고 지키려는 민족주의적 반항을 촉발하는 역작용을 낳게 된다. 이제 불가리아인들 의식 속에 고유 종교인 불가리아 정교 신봉자 = 불가리아인, 이슬람교 신봉자(개종자) = 이방인이라는 공식이 성립되게 된 것이다. 오스만 터키의 이슬람 개종 강요와 불가리아의 저항 속에서 위에서 언급한 응답법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불가리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터키인들은 불가리아인들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는가를 물어보고 개종했다고 답을 하면 살려주고, 개종하지 않았다는 답을 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빼앗았다고 한다. 생명과 개종 속에서 고민하던 불가리아인들은 결국 궁여지책으로 터키인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겉으로는 긍정을, 마음속으로는 부정을 표시하게 되고, 반대로 고개를 저으며 겉으로는 부정을, 내심으로는 긍정을 답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불가리아인들의 지혜와 고집이 5세기에 걸친 오스만 터키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 민족성을 유지한 근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이후 오스만 터키의 종교 관련 지배 패턴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술탄 바야지드 2세(Bayazid II), 셀림 1세(Selim I), 슐레이만 2세(Syuleyman II)등의 집권기를 거치면서 나타난 정책 변화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터키의 지배 영토에 경제적 안정이 오게 되어 종교 면에서 인내심을 보이게 된다. 둘째로 정책적 변환으로 볼 수 있는데 이슬람의 개종보다는 불가리아 정교자들이 서구의 카톨릭에 대항하고 더 반감을 갖도록 유도하는 고도의 전략을 펴게 된 것이다. 여기에 불가리아 민족의 지칠 줄 모르는 저항과 불가리아 종교 지도자들의 역할도 한 몫 하게 된다. 불가리아 정교회와 그 성직자들은 불가리아 민족성을 지키기 위하여 민중들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순수 혈통을 위배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도록 교회에서 교화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거부하다가 순교한 이그나티이(Ignftiy), 가마스킨 가브로브스(Gamaskin Gabrovski)등을 불가리아 정교회가 성인에 봉하는 등, 그들의 활동을 신성시하였다. 결국 이들은 불가리아 민족 보존을 위한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오스만 터키로부터의 해방과 전쟁
17세기에 들어 오스만 터키가 쇠퇴함에 따라 불가리아인들에게는 민족주의 정신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 민족의식이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다. 크리미아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투쟁과 저항을 계속하여 오던 중, 1876년 4월 봉기 시 불가리아인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무자비한 진압(흔히 “불가리아 공포”라고 명명되고 알려짐)으로 발칸 문제는 국제문제화 되게 된다. 러시아의 압력으로 콘스탄티노플 국제회의(1876년 12월-1877년 1월)가 개최되어 불가리아 지역에 자치를 인정하여 주는 것이 검토되었으나 터키는 영국의 지원을 받아 위 제안을 거부하게 된다.
1877년 4월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가 불가리아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터키에 개전하자 불가리아인도 합세하여 승전하고 그 결과 산 스테파노 조약(1878년 3월 3일) 체결로 불가리아는 터키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그러나 산 스테파노 조약의 규정 중 “대 불가리아 창설” 조항이 문제가 되어 러시아와 영국 간에 알력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의 해결을 위해 베를린 회의(1878년)가 재차 개최되게 된다. 위 회의에서 불가리아는 자치 공국의 법적 지위를 가지게 되나 러시아군이 주둔하는 것으로 결정되고 명목상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계속 받는 것이 된다.
1908년 오스만 제국이 청년 터키군 장교 주도의 혁명으로 혼란에 빠지자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불가리아는 강대국간 유럽의 세력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합의 된 조건에 대해, 특히 세르비아와의 영토 문제에 대하여 불만을 갖게 되었다. 결국 1911년 이태리가 터키에 대해 개전하자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및 몬테니그로도 합세하여 터키에 대항, 최종적으로 항복을 받아 내게 된다. 이것이 제1차 발칸전쟁이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가 반목함에 따라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났으며 불가리아는 세르비아, 그리스, 터키 및 루마니아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하고 영토의 현격한 축소를 맞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불가리아와 터키의 관계
근대에서 현대를 가로지르는 약 5세기 간의 터키 지배로 양국관계는 소원한 상태를 지속해 왔다. 특히 1984년 이래 토도르 지프코프(Todor Zhivkov) 서기장 하의 공산 정권이 불가리아에 거주하는 터키계 주민에 대하여 민족 동화 정책을 씀으로 해서 양국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에서 1989년 11월 공산당 정권 붕괴 후 양국 간의 관계가 정상화되기 시작하여 1992년 초대 민주대통령 젤류 젤레프(Zelyu Zhelev) 대통령과 가네프(Ganev) 외무장관이 터키를 방문하고 1993년 2월에는 터키의 오잘(Ozal) 대통령이 불가리아를 답방 한 후 1994년 7월 젤레프 대통령이 터키를 재 답방 하는 등 양국의 우호 관계가 긴밀해 지는 초석을 만들었다. 이후 국제사회에서 터키는 불가리아 정부와 사안에 따른 협력과 경쟁, 대결 등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아울러 불가리아 내에 거주하는 터키계 주민들을 대변하는 불가리아 의회의 제 3당인 <권리와 자유 운동당>의 활동도 정치-사회적 그리고 외교적 관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불가리아를 비롯한 동유럽발칸 지역으로의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 기업체가 공공기관 그리고 국가적 규모에서도 이들 문화의 소통 기술을 익히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부정을 표시하는 불가리아인들의 기저에 깔린 역사의식과 문화적 코드를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들의 마음도 동시에 열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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