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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EU 가입국 크로아티아의 첫 시험대, 부코바르 문제

크로아티아 김철민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대학 교수 2014/05/18

세르비아가 주도하던 구(舊)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이룬지 20여년 만에 크로아티아는 여러 우여 곡절을 이겨내며, 2012년 1월 22일 EU 가입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전체 투표자(43.58%)중 찬성 66.27%로, 마침내 2013년 7월 EU 가입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2000년 이후 '유럽 Now'를 외치며, EU 가입을 통해 진정한 유럽 국가로 도약하고자 했던 크로아티아의 꿈이 마침내 달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U 가입 과정에서 크로아티아는 EU 가입의 여러 장애물들 중 가장 큰 요인이자 국제 사회의 가장 큰 우려를 낳았던, 이웃 세르비아와의 갈등 해소 노력, 그리고 EU 기준에 따라 자국내 세르비아 소수 민족의 권리 보장 및 이들과의 평화적 관계 복원을 약속하였다.
   
EU는 마스트리히트 조약 정신에 따라, 회원국 내에서 소수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보호하려는 노력을 지속해 왔으며, 따라서 현재 EU내 공식 언어만도 크로아티아어를 포함하여 24개에 이르고 있는 상황이다. 작년 7월, EU에 가입한 크로아티아 또한 소수 민족 주민 수가 3분의 1을 초과하는 지역에서는 소수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병기해야 한다는 EU의 요구를 자국 법령에 받아들여야 했으며, 이를 시행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도시로 바로 부코바르(Vukovar)를 들 수 있다. 부코바르는 내전 이전인 1990년엔 44,639명의 인구(크로아티아인 47.2%, 세르비아인 32.3%)가 살고 있었으나, 내전 이후인 2011년 통계에 따르자면 27,683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이중 크로아티아인이 57.37%, 세르비아인이 34.87%를 차지하고 있다.
 
2013년 9월, 크로아티아 정부가 부코바르의 공용 표지판 및 공공 기간 현판에 크로아티아의 라틴(Latin) 문자와 함께 세르비아인들이 사용하는 키릴(Kiril/ Ćiril) 문자를 병기하려 하자, 이 도시의 크로아티아계 주민 및 크로아티아인들은 작년 9월 이후로 현재까지 키릴 문자와 서로 병기된 현판들을 훼손하거나 부수는 등 반발하였다. 이와 함께, 과거 세르비아 민족에 의한 대량 학살이 이루어졌던 이 지역내 주민들을 고려하여 EU 요구 조건이 예외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특별존중지역’으로 선포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미 2014년 5월 초까지 크로아티아 전체 유권자의 10%가 훨씬 넘는 65만 여명의 서명을 받아 국민투표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크로아티아 국민투표법에 따르자면, 유권자 10%가 넘는 서명이 이루어질 경우, 해당 내용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부코바르는 세르비아 소수 민족이 밀집해 있는 지역으로, 오늘날 세르비아 보이보디나(Vojvodina) 지방과의 접경을 이루고 있는 슬라보니아(Slavonia) 지방에 자리하고 있다. 유고 내전 당시 부코바르는 당시 세르비아인이 주도하던 유고연방군(JNA)에 의한 공격으로 크로아티아 여러 도시들 가운데 가장 큰 피해와 함께 가장 큰 희생자가 배출된 곳이다. 실제 1991년 11월 내전 당시 약 2,000여명으로 구성된 크로아티아 시민군이 지키고 있던 부코바르에선 약 36,000여명인 유고연방군의 87일간에 걸친 장기간 포위와 뒤 이은 대량 학살 속에 시민군과 시민 등 약 2,000여명이 살해되었으며, 약 800여명은 실종, 약 22,000여명은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를 당해야만 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참상의 흔적과 아픈 기억은 내전 이전 레스토랑을 비롯한 전망대가 있었던 시내의 ‘워터타워(Vukovar water tower/ Vukovarski vodotoranj)’기념비 등에 아직까지 그대로 남겨져 있는 상황이다.
 
부코바르 대학살의 아픈 기억과 상처는 크로아티아가 EU에 가입 한 이후, 이 지역 평화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으로 다시 부활하고 있다. 그 동안 크로아티아 정부는 EU 가입 전제조건인 발칸유럽의 평화 정착을 위해 세르비아와의 화해 및 관계 개선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게 사실이다. 실제,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소수 민족 문제 해결과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강화 의지는 독립 크로아티아의 세 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보 요시포비치(Ivo Josipovic, 1957-, 대통령 2010- ) 대통령의 당선 연설(2010년 2월)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언론회견에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 정치적 해결의 공감대에 기초하여 우호관계 발전을 제안하였고, 비록 크로아티아의 코소보 독립 인정이 양국 간 관계를 경색시켰던 이유 중 하나가 되었으나, 이로 인한 양국 간 관계 악화가 더 이상 지속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화해 제스처를 표방하기도 하였다. 이어 크로아티아인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게도 또한, 내부적 안정을 도모하고 국제 사회와의 유대 관계 유지가 크로아티아의 국익에 부합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 당시 이러한 발표는 발칸유럽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바라는 국제 사회와 EU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반면에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은 물론, 특히 부코바르 지역을 비롯해 세르비아와의 내전에서 가족과 터전을 잃게 된 전쟁 피해자들의 거친 항의를 수반해야만 했었다.
 
크로아티아에서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요시포비치 대통령은 여기서 더 나아가 2010년 4월 보스니아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 민병대들이 무슬림 민간인 116명을 학살한 아흐미치(Ahmici) 학살 사건과 모스타르(Mostar) 도시 파괴 등을 사과하였고, 보스니아 무슬림이 크로아티아인을 학살했던 보스니아 마을(Krizencevo Selo) 또한 방문하여, 희생자들의 추모와 함께 보스니아와의 화해 및 미래 협력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실제, 이런 그의 노력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 국경위원회 회의가 자그레브에서 개최되어 국경획정 관련 협의가 논의되고, 양국 간 총리 회담 등 여러 고위급 회담 자리로 이어졌으며, 이 자리에서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등 양국 간 화해 분위기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자그레브에서 양국 간 과거 청산을 위한 마지막 절차라 할 수 있는 양국 국무장관 간의 군사협력협정 체결, 그리고 베오그라드에선 양국 법무장관이 만나 부패 및 조직범죄에 관한 양국 간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2010년 7월엔 요시포비치 대통령이 세르비아를 방문하여 보리스 타디치(Boris Tadić, 1958- , 2004-2012) 대통령과 회동하였고, 이 자리에서 양국 피난민의 자유로운 입국 허용, 각 영토 내 소수 민족들의 언어 및 문화 정체성 인정 그리고 문화재 반환 등 과거사 청산에 관한 문제 등이 중점적으로 논의되기도 했다. 양국 간의 화해 무드는 곧 바로 경제적인 교류 확대와 발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2010년 이후로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 내 투자 규모 6위로 상승하였으며, 단절 이후 교역량이 8배 이상 증가하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이것은 크로아티아 기업들의 세르비아에 대한 투자 확대로 이어졌고, 2011년 약 10억 유로 이상이 세르비아에 투자되는 등 양국 간 경제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더불어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화해는 과거 연방 구성국이었던 슬로베니아 기업들과의 상호 투자와 교역 관계로 이어지게 하고 있으며, 국영 철도 합작 회사 설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로 건의 협력을 증진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간의 화해 무드는 2010년 11월 타디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요시포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과 함께 유고 내전 당시 가장 큰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부코바르를 방문하여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고, 내전당시 세르비아 군에 의해 저질러진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는 데 까지 발전되었다. 무엇보다도 과거 내전 당시 저지른 인종 학살에 대한 당시 세르비아의 공식적인 사과는 양국 간 과거사 극복을 위한 우호관계 증진 노력이 소중한 결실을 맺었다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발칸 유럽 지역의 안정과 진정한 평화적 토대를 구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었다. 

 

하지만, 이번 키릴 문자 공용어 표지를 둘러싼 부코바르 갈등의 경우처럼, 힘들게 발전시켜 온 양 국간, 양 민족간 화해와 평화 무드는 새로운 위기와 도전을 맞고 있는 게 또한 사실이다. 이와 함께 올해 3월 4일에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양 국이 내전을 벌이면서 이뤄진 여러 학살 행위를 인종 학살로 규정, 서로가 상대를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 맞고소한 재판이 시작되기도 했다. 크로아티아는 지난 2009년 ICTY 제소 내용을 토대로 세르비아가 지난 1991-1995년 독립전쟁 기간 동안 약 2만여 명의 크로아티아계 민간인 학살과 인종 청소를 주도했다는 점을 비난하였다. 이에 대응해 2005년 세르비아도 크로아티아를 ICTY에 제소하면서, 내전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 민병대가 저지른 인종 학살과 함께, 당시 세르비아인들의 포로 구금 상황이 세계 제 2차 대전 때 크로아티아 극우 정권이었던 우스타샤(Ustaša) 정권에서 자행된 나치 강제 수용소와 같다고 비난하고 있다.

 

향후 부코바르 문제를 비롯해 양국 간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발칸유럽 지역 평화가 그리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국제 사회의 우려는 2012년 5월 당선된 토미슬라브 니콜리치(Tomislav Nikolić, 1952- , 2012- ) 대통령의 과거 세르비아 민족주의적 행보와도 연계되어 있다. 그는 오랫동안 세르비아계가 저지른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짜(Srebrenica) 대학살과 부코바르에서의 비극을 부정해왔고, 이것은 그의 대통령 취임식에 몬테네그로를 제외한 크로아티아 등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가들이 모두 불참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가 2013년 4월 보스니아와의 TV 인터뷰에서 밝힌 스레브레니짜 학살에 대한 공개 사과, 그리고 2014년 5월 6일 부코바르에서 키릴 문자 공용 사용 취소 운동을 주도한 토미슬라브 요시치(Tomislav Josić) 등이 크로아티아 정부에 의해 공공 기물 파손 혐의로 기소되었다는 소식은 그나마 발칸유럽 평화의 초석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거라 하겠다. 이처럼, 현실적 상황을 반추해 보았을 때, 부코바르 문제의 향후 처리는 훗날 EU 회원국인 크로아티아가 진정한 회원 자격을 지니고 있는 지를 묻는 시험대는 물론, 발칸유럽 평화의 가능성을 재단하는 잣대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국제 사회의 관심과 의미가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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