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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사라예보 총성 100년, 제 1차 대전 발발 100주년, 역사적 교훈과 우리의 선택

중동부유럽 일반 김철민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대학 교수 2014/07/18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렸다. 중부유럽에 이어 발칸반도로의 진출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부(Franz Ferdinand 1863-1914/ Sophie Chotek, 1868-1914)가 당시 19세였던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찌프(Gavrilo Princip, 1894-1918)가 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한 이 날은 이들 부부에게 있어선 결혼 14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날이었지만, 세르비아인들에게 있어선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언덕에서 치른 오스만 터키군과의 전투 패배에 따라 중세 왕국이 몰락의 길을 가야만 했던 역사적 치욕을 안겨준 ‘성 비드(Sv. Vid/ St. Vitus)'의 날이었다.

100년 전 사라예보에서의 총성은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게 된다. 독일과의 군사적 동맹을 재확인한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 안들을 제시한 후, 48시간 내 답변을 요구하였다. 이 안에는 황태자 부처 암살과 관련된 인사들의 체포 및 구금 그리고 이를 조사할 수 있도록 오스트리아 관리의 세르비아 입국 허용, 반(反)오스트리아 단체 해산 및 공무원 파면 등 세르비아가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세르비아는 주권을 위협하는 안을 제외한 나머지 안들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피력하였지만,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7월 29일 발칸반도로의 영향력 확보를 추진 중이던 러시아에서 총동원령이 발효되었고, 이에 대해 독일은 러시아엔 총동원령 해제를, 프랑스엔 러시아와의 전쟁 시 프랑스의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였다. 러시아의 거부와 프랑스의 전쟁 개입 불사에 대한 답을 들은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내 유럽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에선 약 500만 명의 민간인과 약 900만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 당시 보스니아와 발칸 유럽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들의 영향력 확보 다툼과 함께 영토 확대를 위한 발칸 유럽 내 국가 간의 잦은 전쟁 등으로 매우 복잡하고 혼미한 상태였다. 당시 이 지역에서 보인 국제적 양상은 우선, 오스트리아의 발칸 유럽으로의 ‘동진(東進) 정책’을 들 수 있다. 당시 국제적 흐름은 식민지 확대 경쟁 그리고 이를 통한 원활한 원자재 공급 및 생산품의 수출 시장 확보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과거 합스부르크 제국의 후신인 오스트리아 제국은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 오랫동안 자신의 영향력하에 있었던 독일 지역 등 서부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했으며, 북으로는 러시아, 남으로는 이탈리아 등에 인해 식민지 및 영토 확장을 꾀할 수 있는 지역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남은 지역은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고 있었던 동부인 발칸반도밖에 없었다. 따라서 당시 오스트리아는 국가 운명의 사활을 걸고 발칸 유럽으로의 진출과 영향력 확대를 추진해 나가야만 했었다.

두 번째, 러시아의 발칸 유럽으로의 ‘남진(南進) 정책’과 ‘부동항(不凍港) 획득 정책’을 들 수 있다. 표토르 1세(Peter the Great, 1672-1725, 재위 1682-1725) 이후로 러시아는 과거 후진적 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서구주의 정책과 계몽주의 그리고 산업혁명 도입을 통해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광활한 지역을 아우르고 있는 러시아는 제국으로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부동항 획득과 함께 전략적함대기지 구축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에 있어서, 크리미아(Crimea) 반도 및 흑해(Black Sea) 연안을 둘러싸고 있는 발칸 유럽의 이해 영역(Interest Sphere) 설정과 영향력 확보는 제국 발전을 위한 필수 요소이기도 했다.

마지막 주요 양상 중 하나는 발칸 유럽 국가 간의 치열한 영토 확보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과거 발칸반도는 14세기 이래로 오랫동안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으나, 19세기 민족주의 시대 이후로 특히 1877년 러시아와 터키 간 전쟁 이후 대부분 독립 국가를 이루게 된다. 이때 독립한 이들 발칸 유럽 국가들과 유럽의 종이호랑이로 쇠락해 버린 터키는 서로 간의 치열한 영토 확보 노력과 경쟁을 치러야만 했고, 이것은 제1, 2차 발칸 전쟁(1912, 1913)을 낳았다.

실제로, 19세기 중엽 민족주의에 고무된 발칸 유럽의 여러 민족은 터키 폭정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대해 터키는 무자비한 진압으로 견제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 민족이자 정교도인 발칸 유럽의 민족들을 이슬람 제국으로부터 구원해 낸다는 미명 아래, 1877년 터키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이후 터키의 항복 속에 1878년 러시아는 불가리아의 영토를 크게 확대해 주는 등 발칸유럽의 상당 민족들을 독립시켜 줌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1878년 3월 산스테파노 조약). 하지만 발칸 유럽으로의 동진정책을 주요 국가 전략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는, 발칸 유럽에서 터키의 급격한 약화가 러시아의 세력 확대는 물론 유럽의 안정에도 심각한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며 유럽의 강대국들을 설득하였고, 마침내 러시아와 터키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여 새로운 조약을 맺는데 성공하게 된다(6월 베를린 조약). 이를 통해 오스트리아는 친(親)러시아 성향의 불가리아 상당 영토를 터키에 다시 돌려주었으며, 이에 대한 대가로 터키로부터 보스니아의 행정권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이 결과 보스니아는 약 400년 동안 자신을 지배하였던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벗어나, 이제는 오스트리아라는 또 다른 지배 제국 하로 편입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후 보스니아를 발칸 유럽을 향한 동진 정책의 전초 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던 오스트리아는 이 지역에 대한 확실한 지배권을 구축하고자 했으며, 1908년 청년터키당 혁명으로 터키의 혼란을 틈타 보스니아를 완전 합방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크게 자극하였으며, 세르비아인들을 중심으로 젊은 보스니아(Mlada Bosna)’, ‘검은 손(Crna ruka)’ 등 여러 비밀 결사단체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프린찌프를 포함한 비밀 요원들은 이웃 세르비아 왕국으로의 보스니아 편입을 목적으로 오스트리아 관료 암살 및 폭탄 테러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했고, 마침내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처 암살과 뒤이은 제1차 세계대전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오늘날, 사라예보의 총성과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이한 보스니아 내 민족들과 유럽의 각 국은 다양한 모습으로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다양한 모습만큼 사라예보의 총성이 울린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 그 기념일을 바라보는 보스니아 내 민족들과 유럽 각국의 인식 차는 더욱더 다양한 스펙트럼을 그려내고 있다.

2014년 6월 28일, EU 공식 곡인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보스니아 내전 당시 불탔다 재건된 국립 도서관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통해 사라예보에 울려 퍼졌다. 오스트리아와 보스니아 정부를 대표하는 각계 인사들은 과거 100년 전처럼, 여전히 분열하며 싸우고 있는 발칸반도에 진정한 평화와 통합, 그리고 보스니아의 진정한 유럽(EU) 편입을 역설했다. 하지만 이날 기념식에는 초기 참석을 희망하였던 세르비아 인사들이 사라예보 국립도서관 입구에 세르비아인들을 '범죄자'로 묘사한 명판이 부착된 데 대해 반발해, 참석하지 않아 반쪽 행사로 전락했다. 대신, 세르비아인들은 행사 전날 본토 보스니아 동부에 자리한 '안드리치 그라드(Andrić grad/ 비쉐그라드 Višegrad)'에서 2m 높이의 프린찌프 동상을 세웠으며, 세르비아인의 자유와 해방을 싸운 프린찌프의 업적 추모식을 따로 치렀다. 이처럼, 사라예보 총성 100년이 지난 오늘날, 동일한 사건과 인물을 둘러싼 보스니아 내 민족들의 서로 다른 역사적 해석과 견해차는 오늘날 보스니아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해 주고 있다.

이와 함께,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EU 28개국 정상들은 6월 26일 제1차 세계대전의 격전지 가운데 하나이자 약 25만 명의 영국군이 사망한 벨기에 서부 예페르(Ieper)를 방문해 추모 행사 및 기념비 제막식을 했다. 이 자리에서 독일 메르켈 총리를 비롯해 각국의 정상들은 EU 존립의 계기가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경험에서 기인하였으며, EU가 유럽 및 세계평화의 초석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등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서유럽과 러시아의 긴장 국면에서 볼 수 있듯, 유럽의 평화는 여전히 불안하다. 또한, EU의 새 집행위원장으로 EU 통합론자이자 독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장클로드 융커(Jean-Claude Juncker) 전(前) 룩셈부르크 총리 지명과 관련해, 이를 반대한 영국의 반대로, 그동안의 합의 추대 관례를 깨고 표결로 지명하는 등 EU 내 불협화음도 보다 확대되고 있다.

사라예보 총성 100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국제 정세는 제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과 매우 유사한 상황이다. 다극화된 국제질서와 강력한 패권국 부재 속에, 세계 각국은 세력 확대를 추진하고 있으며, 과도한 군비 경쟁에 따라 이미 핵무기 억지력도 그 효력을 잃었다. 끊이지 않는 갈등 고조와 분쟁 속에 이것은 ‘사라예보 신드롬(증후군)’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미국 중심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약화되고, 중국에 의한 평화를 의미하는 ‘팍스 시니카(Pax Sinica)’로의 세계 질서 재편이 확대되는 상황 속에서, 100년 전 프랑스, 러시아 대(對) 독일, 오스트리아처럼, 미국 대(對) 중국 간 충돌이라는 우려가 확대되는 중이다. 국제 역학 구도의 급격한 변화 속에, 100년 전 그 날처럼 지정학적 주요 전략지에서의 분쟁과 충돌이 세계 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역사를 교훈 삼아, 이제 우리도 우리의 선택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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