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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체코 정치가들의 탈오스트리아적 행보(1867-1869)

체코 김장수 가톨릭 관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2014/12/22

1867년 3월 15일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1848-1916)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이원화를 공식적으로 선포한 후 체코 정치가들 역시 이 제국의 이원화를 기정사실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들은 더 이상 빈(Wien)의 위정자들과 어떠한 정치적 타협이나 협상도 모색하지 않았다. 아울러 이들은 그들 민족의 법적·사회적 지위 향상 및 민족성 유지를 오스트리아 제국이 아닌 다른 질서체제에서 찾고자 했다. 즉 이들은 지금까지 견지한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Austroslawismus)를 포기하고 당시 슬라브 제 민족의 단결을 강조하던 러시아와의 접촉을 모색했다. 이러한 주의를 오스트리아 왕국에서 최초로 제시한 인물은 도브로프스키(J. Dobrovský)였다. 그는 1791년 9월 25일 오스트리아 국왕, 레오폴드 2세(Leopold II:1790-1792)의 보헤미아 왕위계승을 축하하면서 오스트리아 왕국에 대한 왕국 내 슬라브 민족의 충성 및 헌신을 강조했다(O stálé věrnosti, kterouž se národ slovanský domu rakouského po všechen čas přidržel). 아울러 그는 체코어가 보헤미아 지방에서 다시 사회공용어, 즉 학교와 법정에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견해도 밝혔는데 그 이유는 그가 문화적 측면에서의 자치권획득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는 레오폴드 2세와의 독대과정에서 빈 정부의 중앙정책, 특히 문화적 측면에서의 독일화정책에서 비롯되는 문제점들을 지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개선에 필요한 방안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레오폴드 2세가 도브로프스키의 이러한 건의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팔라츠키(F.Palacký)와 리게르(F. Rieger)를 비롯한 84명의 체코 지식인들이 1867년 5월 15일 러시아방문을 위해 프라하(Praha)를 떠났는데 여기에는 슬라드코브스키(K.Sladkovský), 마네스(J.Manes), 에르벤(K.J. Érben)등도 참여했다. 오늘날 팔라츠키는 체코 민족의 국부(otec narodá)로 추앙받고 있다. 그리고 팔라츠키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했던 인물들도 러시아 방문에 동참했는데 그것은 이중체제 도입을 반대한다는 공통분모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런데 러시아 방문단을 주도한 팔라츠키와 리게르는 러시아 방문에 앞서 파리(Paris)에서 개최 중이던 세계박람회에도 참석하려고 했다. 이들은 결국 러시아 방문 본진과는 달리, 1867년 5월 15일 파리로 향했고 다음날 늦게 프랑스 수도에 도착했다. 파리에 도착한 직후 이들은 박람회 관람보다는 프랑스의 정치가들, 특히 국회의원들과의 접촉을 통해 체코 문제를 외교적 쟁점으로 비화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시도는 예상외의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것은 적지 않은 국회의원들이 체코 문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을 뿐만 아니라, 체코 민족의 독립 필요성까지도 거론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의 상황에 고무된 팔라츠키와 리게르는 베를린(Berlin)과 바르샤바(Warsawa)를 거처 1867년 5월 19일 체코 정치가들의 본진이 머무르고 있던 빌나(Vilna)에 도착한 후 자신들의 파리 방문 업적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다. 빌나는 빌뉴스(Vil’nyus:리투아니아 수도)의 옛 이름이다. 아울러 팔라츠키는 체코 정치가들과 더불어 러시아 방문에 필요한 절차들을 재점검했다. 다음날 체코 정치가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St.Petersburg)에 도착했고 이들은 지나칠 정도의 환영과 후한 대접을 받았다. 리게르는 러시아에서의 이러한 상황을 자신의 부인에게 알리기 위해 편지를 썼는데 거기서 그는 팔라츠키의 명성에 대해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리게르는 팔라츠키의 사위였다.

러시아 방문 중 리게르는 가능한 한 정치적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팔라츠키는 러시아 외상이었던 고르차코프(Gortschakow)와 독대를 하면서 독일 민족과 헝가리 민족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슬라브 민족들이 러시아에 대해 큰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피력했다. 팔라츠키의 이러한 언급은 향후 오스트리아 제국이 멸망할 경우 보헤미아 지방이 프로이센의 전리품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 같다. 1876년 5월 26일 체코 정치가들은 차르스코예셀로(Tsarskoe Selo)로 이동했다. 차르스코예셀로는 ‘차르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24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 별궁이 건축된 것은 예카테리나 1세 때였다. 그런데 차르스코예셀로는 1937년 이 도시에서 교육을 받은 알렉산드르 푸시킨(A.S. Pushkin:1799-1837)의 1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푸시킨(Pushkin)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그러다가 이 도시는 1990년 다시 원래의 차르스코예셀로로 환원되었다.여기서 팔라츠키, 리게르, 에르벤, 그리고 마네스는 알렉산데르 2세(Alexsander II:1855-1881)의 여름 별궁도 방문했는데 이들에 대한 황제의 태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는 슬라브 제 민족의 조국인 러시아에서 슬라브 형제를 맞이한다는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이 당시 러시아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는 차르스코예셀로에서의 상황을 빈에 자세히 보고했는데 그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이 체코 정치가들을 환영하기 위해 그들이 탄 마차 뒤를 따랐으며 이들은 마치 폴리네시아 제도에서 새로운 섬이 발견된 것처럼 기쁨에 들떠 있었다는 것이다. 1867년 5월 28일 팔라츠키를 비롯한 체코 정치가들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이들은 이 도시에서 개최된 환영식에 초대되었고 인근 여러 지역에 대한 방문과 시찰도 했다. 이 도시에서 체코 정치가들은 러시아 방문의 외형상 목적으로 제시한 민속학 전람회를 참관하면서 쉘링(Schelling)과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그리고 드 메스트로(de Maistre)의 민족주의 이론을 수용한 일련의 러시아 지식인들과도 접촉했다. 이러한 접촉에서 팔라츠키는 존경받는 슬라브 역사가로 소개되었고, 도브로프스키(J.Dobrovský)와 1861년에 사망한 샤파르지크(P.J.Šafařík) 역시 학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모스크바에서 팔라츠키는 러시아 지식인, 특히 민족주의자들을 상대로 연설할 기회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체코 민족의 현재적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우선 빈 정부가 체코 민족의 문화적 자치권 요구에 무관심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과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체코 민족의 생존권마저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거론했다. 이어 그는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추진하던 범슬라브주의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는 러시아인들이 일방적으로 지향하는 슬라브 세계의 통합을 포기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러한 시도가 단지 슬라브 세계의 파멸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아울러 그는 러시아 지식인들이 슬라브 제 민족이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끔 협조해야 한다는 것도 강력히 피력했다. 여기서 팔라츠키는 러시아 지식인들이 슬라브 제 민족을 동등한 동반자로 간주할 경우 슬라브 세계의 통합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악사코프(I. Akasakov), 카트코프(M.N. Katkov), 그리고 포고진(M. Pogodin) 등은 팔라츠키의 이러한 관점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슬라브 제 민족의 통합은 반드시 러시아의 주도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고수했다. 아울러 이들은 슬라브 제 민족의 언어, 풍습, 그리고 종교적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팔라츠키가 접촉한 러시아의 민족주의자들은 이차적 민족주의라 간주되는 문화적 민족주의보다는 혈연적 민족주의를 지향했기 때문에 이들은 슬라브 제 민족의 통합실현을 자신들의 선결과제로 인식했던 것이다.

점차적으로 팔라츠키를 비롯한 체코 지식인들은 러시아에서 펼친 그들의 활동이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여기서 이들은 알렉산데르 2세 뿐만 아니라 러시아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주도로 슬라브 세계가 통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신들의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러시아에서의 시도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게 됨에 따라, 리게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당시 민족 운동에 대해 관심을 보였던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1852-1871)의 지원을 받아 그들 민족을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이탈시키려는 새로운 시도를 펼쳤다. 팔라츠키 역시 1850년대 초반부터 체코 민족에 대해 관심을 보인 로베르(C.Robert), 생 르나드(G. E. Saint Renard), 레제르(L.Léger), 그리고 드니(E. Denis) 등의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지속적으로 펼쳤고, 거기서 이들의 지원을 받을 경우 체코 민족의 국제적 지위향상도 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파리방문에서 호의적 반응을 보인 프랑스 정치가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리게르의 시도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후 리게르는 약 1년간 나폴레옹 3세와 비밀접촉을 가졌는데 거기서 활용된 방법은 서신 교환이었다.

나폴레옹 3세와의 접촉에서 리게르는 보헤미아 지방이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경우 이 국가가 프랑스의 중부 유럽정책, 특히 대프로이센 정책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를 강조하는데 주력했다. 즉 그는 프랑스가 체코 정치가들의 도움을 받을 경우 프로이센의 독일권 통합계획을 보다 효율적으로 저지시킬 수 있음을 나폴레옹 3세에게 인지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당시 나폴레옹 3세를 비롯한 프랑스의 정치가들은 비스마르크(Otto v. Bismarck)가 형제전쟁(1866) 발발 이전에 프랑스에게 약속한 영토적 보상을 확신했기 때문에 반프로이센 정책을 공식적으로 전개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따라서 나폴레옹 3세나 이 당시 파리 정부의 실세였던 제롬 나폴레옹(J. Napoleon)은 보헤미아 지방의 독립을 보다 구체화 시키기 위해 1869년 1월 초 파리를 방문한 리게르와의 협상을 회피했다. 그러나 제롬 나폴레옹은 이미 리게르의 계획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방한 바 있었다. 그것에 대한 일례로 그가 1868년 여름 비밀리 프라하에서 팔라츠키와 리게르를 만난 후 체코 정치가들과 프랑스와의 협조체제를 구체화 시키려고 했던 것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제롬 나폴레옹의 시도를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의 계획을 중단시켰다. 나폴레옹 3세의 이러한 조치는 비스마르크의 영토적 보상이 조카의 시도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게르는 프랑스의 입장변화를 기대했으나 결국 그러한 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더욱이 파리 정부는 리게르의 시도를 빈 정부에 넌지시 알려 그의 정치적 행동반경 및 그를 지지하던 체코 정치가들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프랑스의 도움으로 체코 민족의 독립을 모색했던 리게르의 시도는 파리 정부의 회피적이고, 이율배반적인 태도로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했다. 리게르와 프랑스 정치가들 사이의 비밀협상이 밝혀짐에 따라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체코 정치가들과의 타협을 유보시키고 보수주의 정치가로 알려진 하스너(Hasner)를 새로운 수상으로 임명하여 중앙 체제를 보다 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러한 계획을 실행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그 자신이 보헤미아 문제의 심각성을 정확히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빨리 체코 정치가들과 정치적인 타협도 모색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이러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에 대한 체코 정치가들의 반감은 약화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정치가들이 민족이나 국익을 위해 외교정책을 펼칠 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정책을 효율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국력이다. 만일 이러한 것이 결여된 상태에서 외교정책을 펼칠 경우 실제적 효과는 거의 기대할 수 없는데 팔라츠키와 리게르가 러시아 및 프랑스에서 펼친 활동이 바로 그것에 대한 일례라 하겠다. 만일 당시 체코 정치가들이 독립국가의 정치가로 외교활동을 펼쳤다면 분명히 가시적인 성과도 거두었을 것이다. 팔라츠키를 비롯한 체코 정치가들의 활동이 실제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들의 활동을 통해 강대국들 사이에서 약소민족들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실제적으로 이들은 그들 민족의 법적·사회적 위상증대에 필요한 방안을 강구했고, 거기서 다시금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부각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전과는 달리 독립국가로서 활동하는데 필요한 제반능력을 갖출 때까지만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지향하겠다는 한시적 입장을 밝히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향후 펼쳐진 체코 정책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 체코 민족의 국부로 추앙되고 있는 마사리크(T.G.Masaryk)와 베네시(E.Beneš) 역시 팔라츠키의 정치적 관점을 추종했다. 따라서 이들은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제반 능력을 충분히 갖춘 후, 비로소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국가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한 후 그들이 펼칠 행보를 결정한 체코 정치가들의 이러한 자세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하겠다. 특히 강대국들과 외교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야 하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련의 국가들은 체코 정치가들이 펼친 현실적 외교정책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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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주의를 오스트리아 왕국에서 최초로 제시한 인물은 도브로프스키(J. Dobrovský)였다. 그는 1791년 9월 25일 오스트리아 국왕, 레오폴드 2세(Leopold II:1790-1792)의 보헤미아 왕위계승을 축하하면서 오스트리아 왕국에 대한 왕국 내 슬라브 민족의 충성 및 헌신을 강조했다(O stálé věrnosti, kterouž se národ slovanský domu rakouského po všechen čas přidržel). 아울러 그는 체코어가 보헤미아 지방에서 다시 사회공용어, 즉 학교와 법정에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견해도 밝혔는데 그 이유는 그가 문화적 측면에서의 자치권획득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는 레오폴드 2세와의 독대과정에서 빈 정부의 중앙정책, 특히 문화적 측면에서의 독일화정책에서 비롯되는 문제점들을 지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개선에 필요한 방안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레오폴드 2세가 도브로프스키의 이러한 건의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2) 오늘날 팔라츠키는 체코 민족의 국부(otec narodá)로 추앙받고 있다.
3) 빌나는 빌뉴스(Vil’nyus:리투아니아 수도)의 옛 이름이다.
4) 리게르는 팔라츠키의 사위였다.
5) 차르스코예셀로는 ‘차르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24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 별궁이 건축된 것은 예카테리나 1세 때였다. 그런데 차르스코예셀로는 1937년 이 도시에서 교육을 받은 알렉산드르 푸시킨(A.S. Pushkin:1799-1837)의 1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푸시킨(Pushkin)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그러다가 이 도시는 1990년 다시 원래의 차르스코예셀로로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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