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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Československá republika): 탄생 및 그 이후 부각된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체코 김장수 가톨릭관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2015/04/29

1916년 2월, 파리(Paris)에서 마사리크(T.G.Masaryk)는 자신의 측근인 베네시(E.Beneš), 빈 제국의회의 의원이었던 듀리히(N.Dürich), 그리고 슈테파니크(M.R. Stefanik)1)의 지원을 받아 기존의 ‘체코국외위원회(Česky komitet zahranični)’를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회의(Československá národní rada: Conseil National des pays tchèques)’로 확대­개편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파리 정부의 적지 않은 도움도 받았다.2) 여기서 마사리크는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베네시는 서기로 중용되었다. 그리고 슈테파니크는 슬로바키아 대표로 선출되었고 듀리히는 러시아 황실과의 접촉을 전담하게 되었다.3) 1917년 3월 중순부터 다음 해인 1918년 4월까지 마사리크는 페테르부르크(Peterburg), 모스크바(Moscow), 그리고 키예프(Kiev)를 여행했는데 그것은 같은 해 초부터 체코 망명자들, 탈영병들, 그리고 전쟁포로들로 결성되기 시작한 체코 군단 출범을 마무리한 후 이 군단을 연합국 측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시킨다는 계획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마사리크의 주도로 결성되기 시작한 체코군단의 수는 1년도 안 되어 6만 명을 돌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도 각기 1만과 2만의 병력으로 구성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별도로 결성되었다.

1917년 10월, 마사리크가 키예프에 체류하고 있을 때 프랑스에서는 클레망소(G.Clemenceau)의 신정부가 출범했다. 그런데 이 당시 프랑스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그것은 내부적 혼란, 즉 프랑스군 내부에서 발생한 폭동과 전쟁에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한 노동자들이 펼친 강도 높은 파업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마사리크는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프랑스의 부담을 다소나마 덜어주기 위해 클레망소에게 체코 군단의 전선투입을 제안했다. 예상과는 달리 클레망소 정부는 마사리크의 제안을 전격 수용했고 그것에 따라 12월부터 체코 군단은 알자스(Alsace)와 샹파뉴(Champagne)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이 군단은 다음 해인 1918년 초에 이탈리아 전선에도 참여했다. 이 당시 베네시는 연합국에게 더 많은 체코 군단의 전선투입도 제안했는데 그러한 것은 우크라이나(Ukraine)로부터 귀환할 5만 명의 체코군단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이후 체코군단과 별도로 결성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수차례 전투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것은 체코슬로바키아 독립국가 결성에 부정적이었던 연합국의 시각을 반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도 되었다.

이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회의의 주도로 진행된 독립운동은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지향했는데 그 하나는 연합국 측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 필요성을 인지한 후 그것을 전쟁목표 중의 하나로 설정하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향후 등장할 신생공화국의 핵심 국방력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었다.4) 그러나 이 당시 연합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전쟁 목표에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 제국의 존속이 중부 유럽의 안정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 같다.

국외에서의 활발한 활동과는 달리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는 독립의 필요성을 여전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빈 제국의회 의원들로 구성된 체코연맹(Český svaz)은 1917년 1월 31일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거기에서 연합국 측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전쟁 목표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표명되었다.5) 또한, 성명서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외의 다른 국가에서 체코 민족의 장래보장 및 발전 조건을 찾을 수 없다는 견해도 피력되었다. 그런데 체코연맹이 밝힌 이러한 것들은 당시 만연되었던 친오스트리아적 기회주의 정치의 근간에 해당된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코 정치가들의 독자적 관점은 서서히 부각되기 시작했는데 그러한 것은 국내의 정세 변화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에 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카를 1세(Karl I)는 의회 정치를 다소나마 활성화시키려 했고 그것은 체코 정치에 활기를 부여하는 계기도 되었다.6) 이 당시 카를 1세는 수감 중이었던 체코 정치가들에 대한 대규모 사면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이중체제의 근간을 유지한다는 전제하에서 제국 내 제 민족의 평등도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렇게 비독일계 민족에 대한 빈 정부의 우호적 정책이 밝혀짐에 따라 체코 연맹의 정책을 비난하는 문화계 대표들도 정치 일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1917년 5월 17일, 당시 프라하(Praha) 국립극장의 연극 고문이었던 크바필(J.Kvapil)에게 매니페스트(Manifest českých spisovatelu)를 정리·발표하게 했다. 모두 220명의 작가, 화가, 그리고 언론가 들이 서명한 이 성명서에서는 체코 민족의 제 권리 보장과 시민권의 즉각적 회복 등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었다. 또한, 민족 이익을 위해 제국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된 인물들이 더이상 민족적 이익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지 않을 경우 이들 모두는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의원직을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이 성명서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이러한 성명서발표에 자극받은 체코 연맹 역시 5월 30일 독자적인 입장을 밝혔는데 거기서는 제국의 연방화 및 체코 민족에 대한 자치권 부여가 강력히 촉구되었다. 아울러 체코연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연방화 시키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될 체코 민족단위체에 체코는 물론 슬로바키아까지 포함 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성명서에서 거론하기도 했다.      

1918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을 무렵, 체코 및 슬로바키아 민족의 독립시도 역시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국외에서의 독립시도가 가시적인 효과를 거둠에 따라 국내의 상황도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7월 13일 프라하에서 소집된 ‘민족위원회(národní výbor)’는 기존의 친오스트리아정책을 포기하고 독립국가 창설에 필요한 준비에 들어갔다. 체코의 모든 정당이 참여한 민족위원회의 구성은 1911년의 선거결과에 따라 사회 민주당(sociální demokracie strana)에 10명, 농민당(agrární strana)에 9명, 신체코당을 중심으로 한 소수정당연합에 9명, 국가사회당에 4명, 현실주의당(realistická strana)에 4명, 구체코당과 가톨릭(katolická strana) 당에 각각 1명씩 배정되었으며, 의장은 크라마르시(K.Kramář)가, 부의장은 농민당 대표였던 슈베홀라(A.Švehla)와 클로파치(V.Klofăč)가 맡았다. 그리고 라신(A.Rašín), 클로파치, 그리고 소우쿠프(F. Soukup)는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회의’와의 협상을 전담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민족위원회’는 파리에서 활동을 펼치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회의’와의 결속 및 협력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민족위원회’가 공식적 활동을 펼치기 이전인 1918년 5월부터 베네시는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회의’의 대표로 런던(London) 정부와 협상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는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의 요구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협상을 개시한 지 한 달도 안 된 6월 3일 런던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회의’를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의 대표기구로 인정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7) 그리고 6월 29일에는 파리 정부 역시 이 민족회의를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의 공식적 대표기구로 승인했다.8) 미국과 이탈리아 등도 영국과 프랑스의 예를 따랐다.9) 1918년 9월 26일 파리에서 기존의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회의’가 ‘체코슬로바키아 임시정부’로 개편되었고 마사리크를 수상으로, 베네시를 내무 및 외무담당 장관으로, 그리고 슈테파니크를 국방장관으로 기용한다는 것이 거론되었다. 이렇게 구성된 체코슬로바키아 임시정부는 9월 28일 파리 정부와 조약을 체결했는데 거기서는 프랑스가 역사적 국경을 토대로 한 체코슬로바키아 독립국가 창설에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이 언급되었다. 이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었던 마사리크는 10월 18일 워싱턴 선언(Washingtonská deklarace)으로 알려진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선언을 미국 정부에게 전달했는데 거기서는 특히 자연권과 미국 및 프랑스의 민주주의체제를 향후 독립국가의 정치체제로 수용하겠다는 것이 명시되었다.10) 이 당시 카를 1세는 마사리크와 그의 추종세력이 펼치던 국외활동에 대응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10월 16일 자신의 마지막 성명서인 ‘충성스런 오스트리아 제 민족(treue österreichische Völker)’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민족국가의 연합체’로 변경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체코 정치가들은 곧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그리고 루마니아인들이 소수로서 남게 될 헝가리가 개혁대상에서 배제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들로 하여금 더 이상 카를 1세의 개혁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게 했다.
 
10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항복 소식이 프라하에 알려짐에 따라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고, 같은 날 결성된 ‘10월 28일의 대표자’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11) 이러한 소식을 접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교섭자들은 같은 날 스위스의 제네바(Genéve)에서 긴급회동을 가졌고 거기서 크라마르시를 수상으로 하는 정부구성과 마사리크를 초대대통령으로 지명한다는 결정도 했다.

체코 측의 능동적 대응과는 달리 슬로바키아는 사회전반의 낙후성과 정치 기반의 취약성 등으로 체코와의 독립국가 창설에 대해 미온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에 반해 국외의 슬로바키아인들은 1918년 5월 30일 피츠버그(Pittsburg)에서 체코인들과 회동하는 등의 적극성을 보였고 거기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통합에 대해 합의하는 등의 민첩성도 보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30일 피츠버그 협약으로 알려진 합의문이 공포되었는데 거기서는 특히 슬로바키아인들이 독자적으로 정부, 의회, 그리고 법원을 구성할 수 있다라는 입장이 표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향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 시행을 둘러싸고 상당한 파란을 유발시키기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하여튼, 국외 슬로바키아인들의 활동으로 슬로바키아의 국내 정치 역시 점차 체코와의 통합 쪽에 비중을 둠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 연맹(českosvenská jednota), 슬로바키아 가톨릭당, 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slovenšti sociální strana) 등도 차례로 이러한 움직임에 가세했다. 1918년 10월 30일, 투르찬스키 스바티 마틴(Turčianský Svätý Martin)에서 소집된 ‘슬로바키아 민족회의(Slovenská národní rada)’는 슬로바키아와 체코의 통합을 지지하는 슬로바키아 민족의 선언(Deklarace slovenského národa), 즉 마틴 선언(Martinská deklarácia)을 채택하게 되었다.
 
1918년 11월 여러 정당들의 대표들을 보강한 민족회의는 그 명칭을 ‘임시국민의회(Revoluční národní shromáždění)’로 변경했고 이어 개최된 11월 14일의 첫 회의에서 민주공화정 체제의 도입이 공포되었고, 마사리크를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Československá republika)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신생공화국이 이렇게 출범했지만, 내부적으로 적지 않은 문제점들, 특히 민족문제의 해결은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따라 국가의 존망까지 좌우될 정도였다. 실제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로 탄생한 국가였지만, 사실상 옛 제국이 해결하지 못한 민족적 갈등도 그대로 물려받았다. 1919년 9월 10일의 생-제르망(St.German) 조약과 1920년 6월 4일의 트리아농(Trianon) 조약으로 독립과 국경선이 획정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독일인, 헝가리인, 루테니아인, 그리고 폴란드인 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라는 문제점도 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 간의 갈등은 주로 주도민족 대 소수민족으로 나뉜 민족의 경계선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록 마사리크를 비롯한 신생 공화국의 핵심 정치가들이 각 민족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 헌법으로 평가되던 ‘1920년 헌법’을 통해 진보적 민족정책을 펼쳤지만, 민족 간의 갈등은 가장 두드러진 균열적 요소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슬로바키아를 이끌던 제 정당의 분열적 태도 역시 국가의 존립을 위협했다. 비록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슬로바키아 단일민족사상(Czechoslovakism)’을 토대로 형성되었지만,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들은 상이한 민족이었고,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단일민족으로 당연시하는 체코 측과 일부 슬로바키아 정치지도자들의 견해는12) 대다수 슬로바키아인들의 일반적 정서와도 괴리된 상태였다.13) 이러한 괴리감은 체코중심으로 운용되는 각종 정책, 프라하 중심주의, 그리고 체코의 비종교적 정서와 맞물리게 되면서 1920년대 말에 이르러 슬로바키아의 자치 확대 및 궁극적으로 국가 분리를 요구하는 정치세력의 등장도 요구했다.

프라하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신생공화국이 등장한 이후 나타난 제 문제, 특히 민족문제 해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는데 이것은 정부의 핵심 인물들이 국가통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경험을 가지지 못한데 서 비롯된 것 같다. 실제적으로 마사리크를 비롯한 프라하 정부의 실세들은 당시 부각된 민족문제를 타협보다는 자신들의 일방적 관점에서 해결하려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만일 이들 정치가들이 충분한 정치적 경험을 했다면 이들은 중도적 관점, 즉 소수 민족으로 전락한 독일인, 헝가리인, 루테니아인, 그리고 폴란드인들의 입장을 배려하는 정책을 펼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민족문제는 체코슬로바키아만의 문제가 아닌 신생 독립국가들의 공통된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1945년 이후 등장한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가들의 상당수가 민족문제를 안고 출범했지만 그러한 문제를 평화스럽게 해결한 국가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국가들의 일부는 민족문제로 인해 국가가 분리되는 상황에 놓였는데 우크라이나에서 발생된 분쟁이 그 대표적인 일례라 하겠다. 키예프 정권이 우크라이나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러시아인들에 대해 강제적인 ‘우크라이나화’보다 그들의 민족적 특성을 보존하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정책을 펼쳤다면 러시아가 개입된 현재의 유혈적 사태 역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1) 슬로바키아 출신의 천문학자였던 슈테파니크는 프라하 대학에서 마사리크의 강의와 세미나에 집중적으로 참석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1905년부터 파리 근처의 천체물리학 관측소(Astrophysikalisches Observatorium)에서 근무했다. 그러다가 슈테파니크는 1914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후 공군장교로 입대했다.
2) 이 당시 프라하에는 마사리크와 베네시를 추종하던 인물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국내의 상황을 정례적으로 마사리크와 베네시에게 알려 주었다.
3) 듀리히는 러시아에서 당시 러시아 지식인들이 지향한 범슬라브주의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 인물로 하여금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회의에서 탈퇴하게끔 했다.  
4) 마사리크는 1915년 4월 당시 런던 정부의 외무장관이었던 그레이(E.Gray)에게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합병필요성을 역설했다.
5) 1월 24일에 발표한 성명서에서도 같은 맥락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6) 1916년 11월 21일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사망함에 따라 그의 조카 아들이었던 카를 1세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7) 이러한 입장을 표명하기 6개월 전인 1918년 1월 죠지(L.George)수상은 체코슬로바키아 독립공화국의 등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당시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내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치권만을 인정해야 한다는 관점을 피력했다.    
8) 프랑스(6월 29일)와 영국(8월 11일)은 체코슬로바키아군을 동맹군의 일원으로 인정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9) 미국은 1918년 9월 2일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회의’를 체코 민족의 공식적 대표기구로 인정했다. 
10) 마사리크는 1918년 5월부터 워싱턴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했다.
11)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붕괴됨에 따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상이었던 언드러시 백작은 연합국을 상대로 즉각적인 휴전을 제안했다.
12) 체코슬로바키아 단일민족사상(Czechoslovakism)이 국가건국과 통일유지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던 것은  슬라브주의에 대한 체코의 강한 정서와 슬로바키아의 헝가리로부터의 독립의지가 맞물렸기 때문이다. 마사리크는 슬로바키아인을 방언사용의 체코인이라 간주했으며, 슈로바르(V.Šrobár)와 호자(M.Hodža) 등 슬로바키아 정치인들은 슬로바키아 근대화를 위해서는 슬로바키아의 ‘체코슬로바키아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슈테파니크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거주하는 슬로바키아인이 체코인이며, 슬로바키아에 거주하는 체코인이 바로 슬로바키아인이기 때문에 결국 두 민족은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단일민족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13) 건국 초기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슬로바키아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체코인들의 참여는 일반화되었다. 슬로바키아에 진출한 체코인들이 단일민족사상에 근거하고 있었던 반면, 슬로바키아인들은 슬로바키아 전체인구의 2.4%에 불과한 체코인들을 그들의 정복자로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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