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영역 건너뛰기
지역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오피니언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영토 분쟁

러시아ㆍ유라시아 일반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2012/08/23

올해 광복절을 전후로 한중일 3국 사이에 벌어진 영토 분쟁은 정치적 갈등을 넘어 경제와 민간 교류 분야로까지 확대되는 추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대한 일본의 민감한 대응에 맞서 과거사에 대한 일왕의 사죄가 언급되자 일본은 핵심 각료의 개인적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이어 한일 간 통화스와프 협정 재검토 및 원화국채 매입 중지 가능성을 띄웠고, 한국은 일본 정권에 기대할 것이 없고 FTA논의에 진전도 어려울 것이라며 더욱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를 놓고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일본과 중국 간의 갈등도 그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댜오위다오가 중국 영토임을 주장해 온 홍콩의 민간단체 활동가들이 15일 오후에 열도에 상륙하여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를 꽂고 국가를 제창하자 실효지배국 일본은 노다 총리가 나서 상륙자 7명을 포함해 선박 탑승자 14명 전원에 대한 ‘엄정한 대처’를 천명했다. 이에 중국 외교부가 즉각 “일본은 이들의 안전과 재산을 위협하는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고 경고하고 나섰고 일본은 이들을 석방하긴 했으나 양국민의 감정은 더 깊은 대립의 골을 향해 치닫는 상황이다.

사실 최근의 영유권 갈등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를 주도한 미국의 책임이 크다.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아시아 태평양 지역 나라들의 관계나 역사적 정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아태지역의 지도를 지정학적 이유에 근거하여 제멋대로 변경했었다. 물론 복잡한 사정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정이 복잡할수록 단순하고 일관된 원칙을 고수했어야 옳았다. 즉 침략 행위에 대한 처벌의 일환으로서 일본에서 빼앗은 영토였다면 그것을 빼앗긴 나라에 돌려준다는 최소한의 원칙은 고수되었어야 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나라들의 관계에 해악을 가져다주는 끝없는 영토 문제의 토양을 만들어낸 미국의 비 일관된 처사는 역사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일본의 한 기자가 미국무부 대변인에게 이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대한 견해를 집요하게 물었다는 기사나 독도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미국이 그었던 국경선 문제에 대한 결정 문안들이 우리 언론에 출현하는 것도 이런 연유와 무관하지 않다.

해상의 작은 섬들에 대한 영유권을 놓고 벌어지는 한일․일중 간 분쟁이 첨예화되자 경제계는 3국간 자유경제무역협정 지대를 만들려는 노력에 장애로 작용할 것을 걱정하는 분위기다. 아무튼 중국을 자국의 경쟁자로 인식하는 미국으로서는 환태평양 국가들과 파트너십을 구축하여 중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킨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전술로서 영토 분쟁에 있어서 침묵을 하나의 카드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베세토 벨트(BESETO Belt)가 동북아의 문화권을 넘어 자유무역지대로서 세계경제의 확고한 경제권으로 발돋움하는 일이 달갑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은 동북아 3국의 정치권이 자국의 여론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활용해 영유권 문제가 터질 때마다 입장 표명을 유보함으로써 자유무역지대 설립의 연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영토 분쟁은 비단 동아시아 3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내륙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독립 이후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영토 분쟁은 국경 분쟁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국경 분쟁으로 나라의 정치, 경제적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대표적인 중앙아시아 국가로 키르기스스탄을 지목할 수 있다. 1991년에 독립한 이 나라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불리지만 주변국과의 계속되는 국경분쟁으로 인해 영세중립국 스위스가 구가하는 평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동서남북으로 중국,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 각국의 국경 관련 논의와 연구가 나올 때마다 계속적인 위협을 받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여러 번에 걸친 국경선 재확정으로 나라의 지도는 십 년 사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국경선이 계속 움직이면서 이제껏 이용하던 길이 갑자기 봉쇄당하거나 짧은 거리를 몇 배나 둘러가야 하는 생활의 불편은 오히려 작은 문제에 속한다. 물류 운송 시 국경 초소에서 소모하는 시간과 불편함은 비용의 증가로 이어지고, 지역 간 갈등의 요인이 되며 때에 따라서는 국경 지역의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가 끊어짐으로써, 혹은 예전에 이 나라에 속하던 땅이 다른 나라의 영토로 분류됨으로써 아예 한 마을의 역사적 연속성이 단절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끝나지 않는 국가 간 알력다툼과 영토 분쟁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은 민족과 국경의 간극을 뛰어넘어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서민들일 수밖에 없다. 그 예가 언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바트켄(Batken) 지역이다. 페르가나 분지에 위치한 바트켄은 마치 홀로 길게 뻗은 나뭇가지처럼 키르기스 영토에서 남서쪽으로 튀어나온 지역의 끝에 위치한다. 이곳은 이미 독립 이전(1989년)부터 토지와 물이용권을 둘러싸고 키르기스인과 타지크인간의 충돌이 발생해 사망자가 발생했던 지역이다. 양 민족 간 갈등은 20여 년간 계속되었고 갈등의 원인도 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2008년도의 보도를 보면 3월 말에 바트켄의 타지크인 150여명이 키르기스스탄 국경 너머의 검문소로 넘어가 상류 지역의 물을 댐에 가두고 4일 동안 관개시설로 방류하지 않은 데 대해 격렬히 항의하며 댐을 파괴하려 하다가 초병들이 총을 들이대자 물러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1월에는 타지크인 50여명이 소떼를 몰고 국경을 넘어 들어가 방목하다 되돌아갈 것을 요구하던 키르기스 국경수비대원을 폭행하고 소총을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올해에도 주민과 군경사이의 마찰에 대한 소식이 들렸다. 국경을 넘나들며 양 민족 젊은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주먹다짐은 아예 갈등의 축에도 들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어떤 이는 우즈베크인과 키르기스인이 정면충돌한 1990년의 ‘오쉬(Osh)주(州) 사건’에 비하면 바트켄 지역의 갈등은 ‘사소한’ 것에 불과한 게 아니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옳은 지적이다. 키르기스스탄 제 2의 도시인 오쉬 인구의 절반 이상이자 오쉬 주 인구의 1/3 이상을 차지하던 우즈베크인들이 지역을 우즈베키스탄으로 편입하거나 자치를 달라고 요구하며 소요를 일으킨 이 사건은 1주일 남짓 지속되었는데, 소요기간 중 사망자 230여명, 부상자 4천명 이상의 큰 인명 손실을 기록한 바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사이의 1100km에 달하는 국경선에는 약 60개 마을이 분쟁의 한가운데 있다. 또 타지키스탄과 접한 971km의 국경 중 519km가 공식적으로 국경획정이 되지 않았고 그 중에 걸친 43개 마을이 분쟁 중이다. 이들 마을의 대부분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하며 인구가 밀집(1100만명)된 페르가나 지역에 위치한다.

국경을 획정할 수 없는 원인을 언급하는 건 간단한 문제다. 소련 시절에 통치의 편의성에 입각해 그어진 행정 경계선이 독립 이후 국경선으로 확정 되었지만 그것이 민족 고유의 역사·문화적 동질성은커녕 자연 지리적 경계조차 감안되지 않은 가상의 선으로서 도로와 운하와 같은 기반시설이나 심지어 개인의 집을 가로질러 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바트켄 주의 키르기스인이 타쉬-튬슉(Tash-Tumshuk)이라고 부르는 마을을 바로 옆집의 타지크인은 타지키스탄의 호자 알로(Hoja Alo) 마을이라고 소개하는 기막힌 일도 벌어지고 있다. 이 마을에는 키르기스인들과 타지크 인들의 집들이 바둑판처럼 서로 뒤엉켜 산재하기 때문에 현재 상태로는 국경선 확정이 불가능하다.

수십 년간 이웃으로 살아 온 양 민족은 오늘도 명절을 함께 축하하고 서로 왕래하며 아이들도 같이 어울려 논다. 그러나 국경선 확정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주민들 사이에 민족 간 갈등이 없을 리 없다. 독립 20년이 넘어가면서 토지와 물 부족, 경제적 곤란, 기반 시설의 노후화, 낮은 수준의 거버넌스, 배타적 민족주의 등 쌓여가는 문제들은 한계 상황에 다다르고 있지만, 각자 자신들의 정부에 어려움을 호소한다 해도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변경 마을에 관심을 돌리는 관리는 없다. 사소한 분쟁이 주민들의 통제 범위를 벗어날 때마다 양국 국경수비대가 나타나 뇌물을 뜯고 주민들을 괴롭힌다.

중앙아시아의 가장 가난한 국가들인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국경선 근처에는 수없이 많은 이런 마을들에 수천호의 주민들이 경계 확정이 되지 않은 분쟁 영토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각자 독립한 오늘날 개별 국가들은 소련 시대에 발행된 서로 다른 지도들 가운데 자신에게 유리한 지도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토 분쟁에 휘말려들면 상대방에 양보하면서 타협하려는 해결책 모색 가능성이 줄어들면서 이와 반대되는 논리를 일관되게 강화해 가게 되어 있다. 타쉬-튬슉 혹은 호자 알로 마을과 같은 상태라면 해상의 섬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동북아 3국의 영유권 다툼 문제보다 상황은 훨씬 심각하며 해결도 더 어려울 것 같다. 서로 간에 토지와 재산을 맞바꾸는 형식으로라도 국경선을 확정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만, 국경선 확정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사실 사막이 많은 지역특성 상 페르가나 계속은 살기 좋은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페르가나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에게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은 존재로 어느 한 종족의 사유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마을의 소식을 전한 8월 2일자 Eurasianet 말미에 언급된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동일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 집단들은 마을이 자신들의 것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각자 자신의 조상인 대지주 홀마트(Holmat)를 내세운다는 내용이다. 그는 이 지역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노동에 대한 대가로 토지를 나눠주기 시작한 인물인데, 키르기스인들은 홀마트가 키르기스인이라고 주장하고 타지크 인들은 타지크 인이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공동의 뿌리와 역사에 근거한 수백 년 삶에 대한 기억. 민족적 차이를 초월해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자산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중앙아시아 분쟁 지역을 이해하는 열쇠이자 요긴한 자원이다. 지혜롭게 활용하기만 한다면 공동 기억의 유산은 지역 분쟁 해결의 훌륭한 열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평화와 공존을 누렸던 시절의 기억과 그 지혜를 공유하자는 합의로 분쟁의 해결을 모색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

본 페이지에 등재된 자료는 운영기관(KIEP)EMERiCs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