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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다뉴브의 진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헝가리 김지영 한국외국어대학교 외래교수 2012/12/25

부다페스트(BUDAPEST)는 헝가리의 수도로서, 인구 170 만의 중부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총 면적이 525 km2로서, 다뉴브강(헝가리어로는 두나강)을 중심으로 왼쪽은 페스트라고 불리며 모두 325 km2의 평지로 되어있고, 동쪽은 부다라고 불리며 면적이 173 km2이다. 이 두 지역은 역사적으로 발전 과정이 다른데, 폐스트 지역은 중세 이래로 상업과 예술의 도시이고, 부다지역은 13세기 이래로 헝가리의 왕과 기족, 시민들의 거주지로 기능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부다 왕궁과 더불어 역사적 유물들과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 많이 산재해있다. 역사적 의미의 헝가리 수도를 말할 때는 이 ‘부다’ 지역만을 의미한다. 부다의 북쪽인 오부다(OBUDA)는 19세기 중엽까지 농업이 주 산업이었다. 이 부다, 페스트, 오부다의 3개 지역은 각기 독립적으로 발전해 오던 중, 1873년 헝가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헝가리인’으로 불리는 세체니 이스트반(SZECZENYI ISTVAN) 백작의 노력에 의하여 하나의 도시로 통합되었다. 1848년 부다와 페스트를 이어주는 최초의 현수교인 ‘란치드’가 개통되어 부다페스트라는 도시 건설의 한 출발점이 되었으며, 그 후 각 분야에서의 발전과 세체니 이스트반과 같은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오늘날의 부다페스트가 건설되게 된 것이다. 현재 두나(도나우)강에 걸려있는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서 단연 ‘란치드’가 꼽히고 있으며, 건축된 지 15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까지도 부다페스트의 상징으로서 그 모습을 지켜가고 있다.

부다페스트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정착 흔적은 부다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서 부다 地域의 언덕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유물은 두나(도나우) 강변에서 발견되었다. 현대적 의미의 도시 형성은 로마인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는데, 지금의 오부다 地域인 Aquincum 에서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5세기 초 로마 군이 헝가리 지역에서 철수할 때까지 로마제국의 경계이면서 로마의 한 주였다.(그 당시의 이름은 Pannonia 였다).  헝가리 민족이 유럽으로 이주하고 있던 당시 이 지역은 많은  수의 독일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헝가리인들은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인들을 서쪽으로 밀어내면서, 895-896년경 마침내 지금의 카르파티안 분지를 거의 정복했다. 헝가리인들은 이곳에서 아르파트를 지도자로 하는 국가를 건설하였다. 초기 건국당시는 하나의 國家라기 보다는 부족들의 연합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헝가리인들을 이곳으로 이주 해올 당시 그들은 7 개 부족의 연합체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헝가리의 첫 수도는 부다페스트에서 서북쪽으로 약 60 km 떨어진 에스테르곰이었다. 그 후 수도를 비쉐그라드로 옮겼으며 , 지금의 부다 지역으로 수도를 이전하게 된 것은  1241-1242년의 몽고군 침입 후이다. 이 당시 왕이었던 벨라 4세가 왕궁을 부다에 지었으며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부다는 헝가리의 수도로써 발전하기 시작했다.

헝가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되며 헝가리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어냈던 마티아스왕의 통치 기간은 문화적으로 헝가리의 르네상스기에 해당된다. 이 당시 헝가리는 유럽의 문화, 예술의 한 중심지로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마티아스 왕의 사후 헝가리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고,1526년의 모하치 전투에서 터키 군에 대패한 이후, 거의 150년 동안 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17세기 말 사보이 公國의 유진 왕자에 의하여 헝가리가 해방되었을 때, 부다페스트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고, 경제상태도 최악이었다. 터키가 물러간 후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하에 놓였다. 이후로 약 150년간의 합스부르크 제국의 학정과 폭정의 시대였다. 헝가리인들은 복속민으로서 취급을 받았으며,1839년 독립전쟁 발발당시까지 합스부르크 제국의 가혹한 통치를 받아야했다. 줄기차게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던 헝가리는 마침내 1867년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대타협(AUSGLEICH) 을 통하여 합스부르크-헝가리 이중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이중왕국 형태의 정치체제는 5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헝가리인들의 제국의 한 구성원으로써 대우를 받았으며, 헝가리인이 합스부르크 헝가리 제국의 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헝가리는 주축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패전하게 되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부속 조약인 트리아농 조약에 의하여 전 국토의 2/3를 주변국가에 할양하였다. 국경선의 변경으로 인하여 헝가리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소수민족을 갖고 있는 나라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2차 대전 당시 헝가리가 급부상하는 나치의 세력에 동조하게 된 것도 1차 대전에서 잃어버린 구 영토를 회복하려는 ‘실지회복주의’에 기인한바 크다. 2차 대전을 겪으면서 부다페스트는 전체 영역의 70 % 이상이 파괴되었으며, 전후 1967년까지 이를 모두 복구하여 오늘날의 부다페스트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다뉴브의 진주’,‘동유럽의 파리’등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진 부다페스트는 동유럽 최대의 도시로서 서유럽의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을 만한 도시이다. 시내를 관통하는 도나우강(헝가리인 들은 ‘두나’강이라고 부른다)은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강으로서 부다페스트를 부다와 페스트지역으로 나눈다. 도나우강에는 11 개의 다리가 걸려있는데, 이중 란치드(사슬다리)라고 불리우는 다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관광명소도 란치드를 중심으로 하는 도나우강 연안에 집중되어있다.

헝가리의 전통적인 음식으로는 ‘구이야쉬’라는 수프가 있는데, 우리의 육개장과 맛이 비슷하며, 헝가리인들이 가장 즐기는 음식중의 하나이다. 전반적으로 헝가리의 음식은 매우 짠 편이다. 내륙국가로서 소금이 귀한 향신료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지금도 음식에 소금을 많이 사용하여 조리한다.

예술과 문화의 도시로서 부다페스트에만 약 300 여개의 관현악단(직장단위 포함)이 있으며, 오페라, 연극, 음악회 등이 거의 1 년 내내 쉬지 않고 공연되고 있다. 서유럽 국가들에 비하여 입장료 등이 매우 저렴하며 그 수준도 상당하다고 알려져있다. 특히 부다페스트 근교의 마르톤바샤르에서 매년 개최되는 ‘베토벤  페스티발’은 세계적인 권위의 음악 축제로서 전 세계각지로부터 음악인들이 몰려든다. 헝가리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음악가로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페렌츠 리스트’,‘졸탄 꼬다이’,벨라 바르톡‘ 등이 있으며, 현재 활동하는 세계적인 예술가로는 피아니스트 ‘언드라쉬 쉬프’,‘졸탄 코쥐치’등이 있다. 특히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등은 우리에게도 매우 낯익은 곡으로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부다페스트는 야경이 매우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보지 않고는 진짜로 부다페스트를 구경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다페스트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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