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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구 오스트리아주의와 오스트리아적 대독일주의

중동부유럽 일반 김장수 관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2014/07/09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중앙집권화정책은 그녀의 후계자들에 의해 답습되었는데 여기서 이들은 오스트리아 왕국 내 비독일계 민족들에 대한 배려정책을 등한시하는 등의 실수를 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왕국에 대한 비독일계 민족들의 반발은 미미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의 민족운동이 저변으로 확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3월 혁명(Märzrevolution, 1848)이 발발한 이후부터 급변하게 되는데 그것은 제국 내 비독일계 민족들인 체코 민족, 슬로바키아 민족, 슬로베니아 민족, 크로아티아 민족, 헝가리 민족, 폴란드 민족, 그리고 이탈리아 민족이 정치체제의 변경과 그것에 따른 제 민족의 법적·사회적 평등을 강력히 요구한데서 비롯되었다. 이 당시 비독일계 민족의 선각자들과 추종세력은 그들 민족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독일 민족과 그들 민족 간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점에 대한 빈(Wien) 정부의 무관심한 태도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아울러 이들은 3월 혁명의 제 요구, 즉 언론과 집회 및 결사의 자유, 일반 대의기구의 소집, 배심원제의 도입, 강제노역 및 농노제의 철폐, 종교의 자유, 그리고 조세제도의 개편 등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주장도 펼쳤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권의 다른 국가들보다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독일의 통합방안으로 등장한 대독일주의(Großdeutschtum)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Frankfurter Nationalversammlung)에서 채택될 경우 필연적으로 야기될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체 역시 빈 정부의 입지를 크게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1) 그러나 이 당시 빈 정부는 이러한 국내외적 문제들을 원만히 해결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해결책 마련에도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됨에 따라 제국 내 독일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민족이 그 동안 누려왔던 법적․사회적 특권을 보장받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가를 숙고하게 되었고 거기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이 그들 민족의 우위권보존과 직접적으로 연계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존속에 필요한 방안들을 모색했고 거기서 빈 회의(1815)이후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구 오스트리아주의(Altösterreichertum)를 보다 체계화시키려고 했다. 아울러 이들은 구 오스트리아주의를 실제적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강구하기 시작했다. 거의 같은 시점 대독일주의의 변형이론으로 오스트리아적 대독일주의(sterreichisches Großdeutschtum)가 또 다른 해결방안으로 대두되었는데 이것에 대한 제국 내 독일 정치가들의 관심 역시 높았다.

3월 혁명이 발생한 이후 구 오스트리아주의는 대독일주의를 지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을 혁명 이전의 메테르니히(Metternich)체제(1815-1848)로 복귀시켜야 한다는 입장도 분명히 밝혔다.2) 아울러 구 오스트리아주의는 지금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권에서 행사했던 주도권 역시 견지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이에 반해 오스트리아적 대독일주의는 메테르니히체제의 재도입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신생독일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만을 참여시킨다는 프랑크푸르트의 통합 안에도 반대했다. 그렇지만 오스트리아적 대독일주의는 ‘지금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권에서 행사했던 주도권은 계속 견지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쳐 구 오스트리아주의와 견해를 같이 했는데 그러한 것은 구 오스트리아주의와 오스트리아적 대독일주의가 당시 제국 내에서 제기되던 민족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음을 확인하게 한다. 따라서 이들 양 주의를 추종했던 세력은 민족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제시에 등한시하는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3월 혁명이 발발하기 직전인 1840년대 후반부터 구 오스트리아주의자들은 제국 내 제 민족의 혈연적-언어적 특징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만 오스트리아 제국이 존속 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것의 실천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따라서 이들은 제국 내 제 민족의 법적․사회적 평등화를 위한 노력을 펼쳤지만 그것은 오히려 각 민족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빈 정부의 민족정책을 비판하는 요인만을 제공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독일적 요소가 강조된 기본적 골격을 유지하면서 제 민족의 법적․사회적 평등, 즉 제한적인 평등만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구 오스트리아주의자들은 제국 내 비독일계 민족들의 지방의회구성을 허용하려고 했지만 이들은 지방의회가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기존의 관점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국가통치, 고등교육, 그리고 고등예술의 효율화 및 발전을 위해서는 독일어가 제국공용어로서 계속 사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구 오스트리아주의는 메테르니히체제의 모순점들이 구체적으로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적 요소가 강조된 중앙주의적인 입장에서 거의 이탈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적 취약성 때문에 구 오스트리아주의는 메테르니히체제가 붕괴된 이후부터 소수 정치가들에 의해 그 정당성이 옹호되는 수세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구 오스트리아주의자들은 빈 정부가 자유주의 및 민족주의 원칙에 따라 제국 내 제 민족에게 폭 넓은 자치권을 부여할 경우 이들 민족들을 효율적으로 제어할 방안이 없는 위기적 상황에 놓이게 되리라는 점을 부각시키는데 주력했다. 또한 이들은 3월 혁명 이후 수차례에 걸쳐 빈, 프라하(Praha), 그리고 부다(Buda)에서 개최된 정치집회에 의도적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구 오스트리아주의자들은 언론이란 매체를 통해, 즉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이 가지는 타당성을 제국 신민들에게 홍보하려고 했다. 이 당시 구 오스트리아주의를 지지하던 티롤(Tirol)출신의 페르탈러(H. Perthaler)는 1848년 3월 20일자 빈 신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일고찰(Betrachtungenüber die welthistorischen Bedeutung desösterreichischen Kaiserstaates)’이라는 긴 제목의 기사를 투고했다. 여기서 그는 우선 제국의 신민들이 제국 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민족적 다양성과 거기서 비롯되는 민족적 분쟁 또는 대립들을 주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해결책 제시에 대해서는 등한시했음을 지적했다. 이어 그는 이러한 소극적 자세가 비롯된 원인들에 대해서도 분석했는데 그것은 첫째, 제국의 신민들이 오스트리아 제국 이외의 다른 국가에서 동일한 상황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 둘째, 그것의 해결에 필요한 방안강구를 모색할 경우 오히려 제국통치에 부담만이 된다는 믿음을 이들이 가졌다는 것이다. 또한 페르탈러는 제국의 신민들이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세계사적 의미(Welthistorische Bedeutung)를 파악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토로했다. 즉 그는 신민들이 제국적 특색 속에서 ‘제 민족의 평화로운 공존’이 잉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던 것이다.

이렇듯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구 오스트리아주의가 수세적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대독일주의가 지향하는 독일권의 통합범위가 구체적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제국 내 독일 정치가들은 그들의 입장을 명확히 밝혀야 했고 그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적 대독일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적 대독일주의의 추종세력은 독일연방을 토대로 한 프랑크푸르트의 통합방안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3) 이 당시 이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가 아닌 전체가 독일통합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그것은 이러한 유형의 통합만이 제국 내에서 그동안 독일 민족이 누려온 법적․사회적 우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 같다. 아울러 이들은 당시 슬라브 정치가들, 특히 체코 정치가들이 요구했던 연방체제(Federálnísystém)의 도입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체제의 도입으로 그들 민족의 위상이 크게 격하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 같다. 따라서 이들은 제국 내 비독일계 민족에게 제한적 자치권만을 부여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슬라브 민족에 대한 오스트리아적 대독일주의자들의 이러한 자세는 이들이 슬라브 민족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데서 비롯된 것 같다. 즉, 이들은 슬라브 민족이 오스트리아 제국을 이탈하여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 정책에 따라 러시아의 지배하에 놓일 때 그들의 법적·사회적 지위가 이전보다 훨씬 열악해 지리라는 것을 인지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의 통합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여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 이해되던 대독일주의와 근본적으로 시각을 달리 했다.4)

프랑크푸르트적 대독일주의에 대한 보충 내지는 반발대안으로 오스트리아적 대독일주의가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제기되고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 참석한 오스트리아 출신 의원들이 그것에 따른 통일을 추진함에 따라 비오스트리아 지역 출신 의원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5) 이들은 독일통합을 위해 오스트리아 제국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고,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오스트리아 제국을 해체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견해도 제시했다. 즉,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견해는 헝가리를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롬바르디아(Lombardo)와 베네치아(Venezia)를 이탈리아의 혁명세력에게 이양하고, 갈리치아(Galicia;Galicja)를 새로이 통합될 폴란드에 할애할 수 있게끔 정책적 배려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6)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대다수의 의원들이 기존의 질서체제와의 타협을 통해 독일권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견해 역시 점차적으로 국민의회 내에서 지지 세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부터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독일연방을 토대로 한 대독일주의보다 오스트리아 제국을 배제시킨, 즉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권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소독일 주의에 대해 관심을 보였고 그것을 실천시키기 위한 방안도 강구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3월 혁명이 발생한 이후 제국 내 독일 정치가들이 제시한 구 오스트리아주의와 오스트리아적 대독일주의는 공통의 목적을 지향했는데 그것은 독일 민족이 제국 내에서 가졌던 기득권을 계속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양 주의를 추종한 세력은 당시 제국 내에서 부각된 민족문제의 심각성을 등한시하는 실수를 범했고 이것은 제국의 상황을 이전보다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일반적으로 어떤 국가나 사회에서 제기되거나 해결해야 할 중차대한 문제가 어느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일방적 의도에 따라 처리될 경우 국가 및 사회구성원들은 거기서 비롯되는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국가의 존속이나 이익에 연계되는 중요한 문제점들은 그 해결책 마련에 앞서 사회구성원의 보편적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고 하겠다.

 

1)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1848년 5월 18일부터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2) 구 오스트리아주의는 메테르니히체제가 적립된 1815년 이후부터 이론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3) 1814년 11월부터 1815년 1월 까지 빈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독일 연방(Der Deutsche Bund)의 구성은 가장 이견이 많았던 난제였다. 빈 회의가 소집되면서부터 독일 문제는 독일인에게 위임시킨다는 원칙하에 오스트리아․ 프로이센․바이에른․뷔르템베르크․하노버 등의 대표로 독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하여 5개월여 동안 회의조차 개최하지 못했다. 회의에 참여한 대부분의 대표들은 대륙의 안정을 위해 ‘독일 문제’의 원만한 해결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규모, 영역, 방식에서 수많은 논쟁이 동반될 수 밖에 없었다. 열강들 중에서 비교적 규모가 작았던 프로이센은 빈 회의를 통해 자신들의 위상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독일위원회에 참석한 다른 국가들은 프로이센의 그러한 의도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캐슬레이(Castlereagh)의 주선으로 메테르니히는 자신이 제안한 영방 조직 안을 1815년 6월 8일 독일위원회에서 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나폴레옹(Napoleon) 전쟁 이전에 시행되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해체가 재확인되었고 34개의 군주와 4개의 자유시로 구성된 독일 연방이 탄생하게 되었다. 독일 연방에 참여한 모든 국가들은 주권을 가진 자주 국가라는 것이 명문화되었으며, 영방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황제 이외에 홀수타인(Holstein)의 덴마크 왕, 네덜란드 왕, 룩셈부르크 공작과 같은 독립 국가들의 군주들도 동등한 자격으로 영방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도 명시되었다. 그리고 이들 국가 간에는 상호 군사적 독립성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의 내부적 무력 사용은 불허되었고 외부적 침략이 있을 경우 상호 지원해야 한다는 것도 명시되었다. 따라서 독일 연방은 국가수반도, 행정기구나 집행기구도, 공통적인 법체계도, 공통적인 공민권도 없었다. 이후부터 오스트리아는 자유주의 사상과 민족주의 정신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연방 내에서 중소 국가에 대한 영향력증대에도 주력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독일 영내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4)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 역사가들은 오스트리아적 대독일주의의 당위성을 부각시킨 반면, 독일 및 체코 역사가들은 그러한 관점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5) 거의 같은 시점 보헤미아 지방의 독일 정치가들 역시 그들이 19세기 초반부터 강조했던 보헤미아주의(Böh-menismus)를 실제 상황에 적용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주의를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킨 인물은 프라하 대학의 볼자노(B.Bolzano) 교수였는데 그것은 그가 1848년 4월에 행한 연설에서 보헤미아주의의 핵심적 내용을 체계적으로 언급한데서 확인할 수 있다. 볼자노는 자신의 연설에서 우선 보헤미아 지방민들은 그들 지방이 유럽에서 가장 비옥하고, 풍요로운 지방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피력했다. 이어 그는 이렇게 축복된 지방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분명히 신으로부터도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거론했다. 볼자노는 보헤미아의 지방민들, 즉 독일인들과 체코인들은 학문의 여러 분야에서 뛰어날 뿐만 아니라 미덕 및 숭고한 행위에서도 충분한 능력을 가졌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 따를 경우 보헤미아 지방의 풍요로운 제 환경은 주변 민족들의 관심 및 탐욕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외부적 관심 및 탐욕으로부터 보헤미아 지방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즉,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방내의 독일인들과 체코인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볼자노가 그의 연설에서 밝혔듯이 독일 정치가들은 민족 간의 대립보다는 화해 및 공존을 통해 자신들이 향유했던 제 권리를 계속 보존시키려고 했고 그것을 위해 이들은 체코 정치가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입장을 알려 그들로부터 협조도 얻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6) 갈리치아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남동부에 걸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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