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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노동 이주, 그 명암

남아프리카공화국 설병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2015/02/17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으로 표기)에서 노동 이주는 상당히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50년대까지 남아공의 주요 경제는 생계 농업이었다. 그러다가 1867년 오렌지자유국(Orange Free State)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 1886년 트란스발(Transvaal)에서 금이 발견됨에 따라, 이러한 양상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다이아몬드와 금 발견은 경제 폭발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 전환기를 열었다. 경제 활동, 특히 점증하는 광산업과 2차 산업 부문 및 상업화된 농업에서의 자극은 (값싼) 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켰다. 이 과정은 광범한 도시화의 발생을 촉진했다. 광산업과 2차 산업에 종사하는 비숙련 노동력의 대부분은 농촌 지역에서 충원되었다.

농촌 출신 노동자들 중의 대다수는 도시 지역으로 영구히 이주하지 않은 채 이주 노동 체계에 연루되었다. 그들은 실직이나 은퇴 생활에 대비하기 위해서 가족이나 고향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그래서 그들의 임시 노동 이주는 ‘순환적 이주 패턴’의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이주 노동 체계는 지난 150년간 남아공의 경제 발전에서 가장 독특한 특징들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남아공의 이주 노동 체계에서 큰 변화가 발생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이다. 여기에는 1986년 유입통제법(influx control laws) 폐지와 1994년 인종분리정책(apartheid) 폐지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유입통제법과 인종분리정책이 폐지되면서 대개의 학자들은 이주 노동 패턴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라 예상하였다. 즉, 그들은 영구 이주가 순환적 노동 이주를 대체할 것이라 전망했다. 그러나 최근의 경험적 연구들이 보여 주듯이, 순환적 노동 이주는 종식되지 않았고 쇠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임시 노동 이주 현상은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 현재 남아공에서는 임시 노동 이주가 여전히 노동 이주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으며, 출신지와의 사회․경제적 유대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의 수는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이주 노동 체계는 가족생활과 지역 공동체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남아공의 노동 이주가 지니는 사회․경제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 이주는 ‘통과의례’ 혹은 ‘아비투스’(habitus)의 성격을 띠고 있다. 농촌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은 요하네스버그, 더반 등지에서 이주 노동자로 생활한 적이 있거나 생활하고 있다. 그들의 이주 기간은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십 년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노동 이주는 삶의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그 무엇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노동 이주는 통과의례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노동 이주 과정에서 분리, 전이, 통합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노동 이주라는 관행이 누대에 걸쳐 실천되어 온 탓에, 그들은 이것을 체화되고 내면화된 그 무엇처럼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에서 노동 이주는 아비투스의 속성을 띠기도 한다.

둘째, 노동 이주는 중요한 생존 전략이다. 만성적인 가뭄, 경작 가능한 토지의 부족, 관개 시설의 미비 등은 농민들의 영농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 이러한 지역에 사는 농민들에게 노동 이주는 하나의 생존 전략이 된다. 그래서 상당수의 농민들, 특히 남성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혹은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 노동 이주를 결행한다. 그러나 이주지에서의 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들 중의 대다수는 저임금에 시달리고, 취업과 실업 상태를 부단히 오가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고향의 가족이 살아가는 데 충분한 돈을 마련하기 힘들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의 가족은 텃밭 경작 등을 통해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간다. 이것은 ‘텃밭 경제’(garden plot economy)가 가족 구성원(들)의 노동 이주 과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황들은 비록 노동 이주가 농촌 가족들에게 생존 전략의 의미를 가진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그들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의 빈곤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셋째, 노동 이주는 보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노동 이주는 가족들의 경제적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들의 활동을 다양화 혹은 극대화하는 방편의 하나로 이용된다. 즉, 노동 이주는 농촌 가족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작물 실패나 경제적 변화에 대처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처럼 노동 이주는 ‘생존 전략’과 ‘보험’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남아공에서의 노동 이주를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삶의 과정’으로 보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 즉, 노동 이주는 식민 지배 과정을 통해 주조된 사회구조에 의해 ‘강요된 삶의 과정’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따라서 노동 이주의 과정과 결과 속에서는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노동 이주가 가족생활과 지역 공동체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 이주는 부부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남아공에서 이주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남성이었다. 임금 노동에서 남성의 이주는 여성의 이주보다 상대적 이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가족 단위에서 볼 때 남성의 이주는 여성의 경제적 종속뿐만 아니라 여성의 전통적 역할을 더욱 강화시켰다. 게다가 남편의 장기 노동 이주는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부정(不貞)은 그런 문제 중의 하나이며, 그 빈도는 남편 쪽이 훨씬 높다. 그러나 대다수의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그다지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먼저, 지금도 남아공의 농촌 지역에서는 일부다처 관습이 광범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남편이 부인 이외의 여자와 사실혼 관계를 맺고 자녀를 두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게다가 부인 역시 남편의 장기 부재 기간을 이용하여 다른 남자와 사실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 결과, 어떤 부인들은 아버지가 각각 다른 자녀를 양육하기도 한다. 부인의 외도는 일차적으로 ‘성욕 충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부인의 외도가 도시에 나가 있는 남편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종종 발생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외도는 일종의 ‘생계 전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도시에 나가 있는 남성이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돈을 충분히 보내주지 않을 경우, 그는 별거나 이혼에 직면할 수도 있다.

둘째, 노동 이주는 자녀 양육 및 부모와 자녀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지금부터 대략 한 세대 전, 이주 노동자들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고향집을 방문하여 한달 정도 머물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교통편이 발달한 요즈음은 두어 달에 한 번씩(혹은 공휴일에) 고향집을 방문하여 2, 3일 정도 머물다가 돌아가는 이주 노동자들이 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 이주로 인한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장기 부재는 사회화, 자녀 양육, 부모와 자녀 간의 정서적 유대 등의 측면에서 적잖은 문제를 야기한다. 특히 어머니의 부재는 일상 수준의 자녀 양육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농촌 주민들 중 상당수는 아버지에 대한 유년기의 기억이 별로 없다. 그들의 유년기 기억 속의 아버지란 존재는 ‘공휴일에 선물 꾸러미를 들고 고향집을 방문했던 사람’이었다. 아버지와의 정서적 유대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유년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다른 한편, 남편의 장기 노동 이주는 별거나 이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의 상당 부분은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이 과정에서 자녀들은 아버지나 어머니라는 존재를 점차 잊어버리기도 하고, 때론 그들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기도 한다.

셋째, 지역 공동체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노동 이주는 긍정적 측면보다는 부정적 측면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송금에 대한 의존은 전통적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수단으로 기여하며, 발전을 저해하는 제동 장치 역할을 한다. 이것은 송금에 대한 의존이라는 타성에 젖어 있는 주민들이 생활방식의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청장년층의 노동 이주는 지역 공동체 개발에 필요한 ‘추동력의 상실’이라는 문제를 야기한다. 핵심 노동 인구의 대다수가 유출 상태에 있는 농촌 지역은 ‘무기력한 공동체’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게다가 노동 이주로 인해 개별 가족 단위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종종 지역 주민들 간의 분쟁이나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남편의 장기 부재에 따른 부인의 부정은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소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이주 노동자들은 가족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고자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경제 활동을 해 왔다. 그들은 노동 이주를 통해서 가족 경제와 지역 공동체의 발전에 일정 부분 기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 이주의 또 다른 모습에는 부정적 측면이 도사리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누대에 걸쳐 노동 이주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빈곤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은 요원한 일로 보인다. 어쩌면 노동 이주는 그들의 삶을 옭아매는 ‘하나의 덫’일지도 모른다. 빈곤의 재생산, 부부간의 문제, 부모와 자녀 간의 정서적 유대 약화, 공동체 수준의 문제 등은 노동 이주의 ‘어두운 자화상’이다. 게다가 순환적 노동 이주 체계에 따른 농촌 지역(주변부)의 피폐화는 도시 지역(중심부)의 ‘지배’와 ‘착취’라는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남아공에서의 노동 이주는 하나의 ‘역설적 현상’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남아공의 사회․경제․정치적 문제가 어떤 식으로 해결되느냐에 따라서 그 빛깔을 달리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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